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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Oct 18. 2023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날이라니


덥지도, 춥지도, 습하지도, 바람 불지도 않는 그런 날. 아무 이유 없이 바깥에 나와 앉아 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날들이다.


사소한 집안일을 하다 허리를 우두둑 다쳐서 아침에는 한의원을 다녀오고 낮에는 일하는 시간 빼고 누워 있은지 삼일 째다. 모처럼 누워 쉬는 것도 좋지만 자꾸 좀이 쑤셔서 괜히 밖에 나올 핑계를 만들어본다. 아이의 방과 후 수업이 끝나가는 시간. 재킷 하나 걸치고 살살 걸어서 초등학교 앞 벤치에 앉았다. 집은 서늘한데 바깥은 햇살이 꽤나 더워서 목에 맨 스카프도 풀고, 입고 나온 외투를 벗어 팔에 걸쳤다. (그러고보니 기모 바지에 털 슬리퍼까지 신었다. 너무 앞서 나간 걸까.) 사내의 외투 벗기기 내기를 했다던 해와 바람의 동화가 생각난다. 무조건 해의 승.


오전에 점심밥 대신으로 먹은 소금빵이 체했는지 속이 꽉 막혀 좋지 않다. 정체된 공기가 답답해서 지금보다 바람이 조금 더 불어도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날에도 만족을 모르면 하늘이 벌을 내릴 것 같아서 꾹 눌러 담는다.


벤치 위로 개미가 돌아다녀서 잠깐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오래된 나무 벤치에서 반듯한 새 벤치로 바뀌었다. 몰라봐서 미안. 동네 풍경이 매일 조금씩 바뀐다. 요즘 우리 동네에는 시내에서나 볼 법한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들어왔다. 새 건물도 제법 생겼다. 서울까지 가는 버스도 신식 전기버스로 바뀌었다. 동네 어른들은 이 마을이 이렇게나 발전했다며 좋아들 하신다.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들도 있지만 결국 언젠가 모든 것은 변할 것이다.


아이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온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아이를 맞으러 간다. 1학년 이후로는 데리러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깜짝 놀라겠지. 가끔 이렇게 별일 없이 데리러 나오는 것도 좋겠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 그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오물오물 음미한다.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을 구태여 살피듯. 나의 쓸모라던지, 나는 잘 살고 있을까 라던지,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들은 주머니에 넣고,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다. 등 뒤로 햇살이 덮인다. 가을의 해를 받아 길어진 그림자가 앞서 걸어간다. 나도 따라 걸어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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