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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Oct 30. 2023

점심은 샐러드, 아프면 감기약을 챙겨먹고


아이와 나란히 감기에 걸렸다. 주말 동안 365일 여는 시내의 큰 병원에 아이를 데려가 약을 지어왔다. 비염 알레르기 말고는 큰 병치레를 하지 않는 편이라, 아파 누워있는 아이를 보며 종일 짠했다. 아침에는 볼이 발그스레한 아이에게 내의와 윗도리, 경량조끼까지 입혀서 학교를 보냈다. 이렇게까지 해서 가야 하는 학교일까 라는 생각을 뒤로하고.


안 먹던 아침을 챙겨 먹고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감기약을 꺼내 먹었다. 잠옷 차림 그대로 작업용 책상이 있는 방으로 가 컴퓨터를 켰다. 꼭 오늘까지 해야 하는 작업은 아니었지만 애매하게 “최대한 빨리 해주세요.”라는 요청을 받은지라 일단 할 수 있는 만큼 해놓으려 한다. 사실 작업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다. 어느 정도 분량을 해두면 오후에 누워서 쉬는 마음이 조금 편할 것이었다.


그 어느 정도의 분량을 해놓고, 메일을 보내고 점심 샐러드를 챙겨 먹는다. 거의 한 달째 점심마다 먹는 샐러드다. 드레싱도 매일 같은 올리브 오일, 발사믹 식초, 꿀. 채소는 유기농 모둠쌈채소나 양상추, 토마토와 바나나는 그때그때 있는 것으로 넣는다. 그래놀라 시리얼과 견과류를 조금 넣고, 단백질이 부족하지 않도록 계란 한두 개를 스크램블 해서 곁들인다. 기록 용으로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린다. 요즘 나의 피드는 온통 샐러드 사진뿐이다.


어쩐지 바라는 게 없는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이렇다 할 재미도, 추구하는 바도 없이 퍼석하고 건조한 일상. 진심으로 바라는 것 단 한 가지는 경제적 안정이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시아버지와 무릎 수술을 앞두고 있는 친정 아빠에게 조금이나마 병원비를 보탤 수 있으면 좋겠고, 이제 막 시작된 대출 상환에 마음이 쪼이지 않으면 좋겠다. 겨울 난방비 걱정으로 잠못이루지 않았으면 한다. 적고 보니 바라는 것이 참 많구나. 그래도 일을 해 먹고살 수 있음을 감사히 여겨야 할까. 몸이나마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자꾸 어디가 아프다. 결국 돌고 돌아 바라는 것은 건강인가.


지구 어딘가에서는 전쟁과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고, 며칠 전 본 <TV 동물농장> 프로그램에서는 천마리도 넘는 강아지들을 학대해 온 번식 업체를 고발했다. 각종 폭력과 사기와 마약 사건이 연일 뉴스를 도배한다. 그리고 이태원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희생된 이들의 1주기에 관련된 이야기들. 나는 세상의 고통에 몸살 하다가 눈을 질끈 감기를 매일 반복한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고작 나의 건강과 나의 안녕이라니. 내가 싫어질 지경이다.


그래도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을 더는 미워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오늘도 살아간다. 점심은 샐러드, 아프면 감기약을 챙겨 먹고. 졸리면 낮잠을 재운다. 내 아이를 돌보듯 나를 돌본다. 어떻게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길 것이다. 이런 세상에 살아남은 나의 쓸모가, 작은 유리조각처럼 빛을 내는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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