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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Nov 04. 2023

아픔이 슬픔이 되지 않으려면


며칠째 몸살감기가 낫지를 않는다. 티슈 한 통을 다 쓸 기세로 코를 풀다가 화가 나서 욕을 뱉게 된다. 왜 아프고 xx이야. 지긋지긋해.


아파도 설거지거리는 쌓이고, 일은 해야 한다. 세상의 온갖 불운이 다 나에게로 온 것만 같아 서럽다. 고무장갑을 끼고 쨀쨀거리는 물을 틀어 설거지를 한바탕 해버리고 나니 조금은 후련. 아픈 것보다 못 참겠는 것이 지저분한 그릇이 쌓여있는 싱크대다.


문득 생각한다. 아픔은 왜 슬픔을 불러오는가. 갱년기를 맞은 중년 여성처럼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건 왜일까. 무엇이 그리 억울하고 서러울까. 그냥 누구나 그렇듯 몸이 잠깐 아픈 것뿐인데. 영원할 것도 아닌데.


어떤 상황을 유쾌하게 혹은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본질적으로 동전의 양면 같은 모순을 갖고 있는 게 인생의 참모습이라서 인간은 슬픔도 웃음으로 승화하는 능력을 신에게 얻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능력을 받지 못한 게 분명하다. 나는 웃을 수가 없다. 긍정하는 법 같은 거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기에 나만의 방법을 터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하이퍼 리얼리즘에 가까운 글로 써 뱉어 버린다. 예전에 나의 친언니가 말한 적이 있다. 내 글에 유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나도 그러면 좋겠는데 안 된다. 이슬아 작가처럼 통찰력이 빛나는 가운데 한 꼬집 유머가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겠지.


다시 돌아와서, 나만의 방법으로써 나는 아얘 깊이 담가버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기쁨에도 슬픔에도 온전히 절여지는 방식. 적당히 에둘러 가거나 조금 아껴 놓는 일 따위 잘 모른다. 말 그대로 일희일비의 아이콘이다. 인생의 출렁임에 온전히 그대로 내맡겨지곤 하지만 이게 나란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의 제목으로 ‘아픔이 슬픔이 되지 않으려면’이라고 써놓고 그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실패다. 내가 찾은 것은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 오히려 그걸 받아들이는 게 빠를 것 같다. 이렇게 흠씬 아프고, 슬픔에 푹 절여지고 나면 분명 무엇인가가 되어 있겠지. 어디엔가 다다르겠지. 그 온전한 항해의 마무리, 혹은 여정에서 적어도 내게 주어진 키를 놓지만 않는다면. 만나는 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놓지만 않는다면. 삶에 대한 집착도 원망도, 그럼에도 내게 주어진 사명들마저도 놓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됐다. 그 사명이 한바탕의 설거지든, 하기 싫은 작업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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