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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Dec 29. 2023

내가 있는 자리


"작가님이 꼭 결혼하면 좋겠어요. 애도 낳고요. 그럼 또 얼마나 삶이 달라지겠어요? 그럼 또 얼마나 이야기가 생겨나겠어요? 나는요. 계속 달라지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듣고 싶어요.“


나는 무대에 서서 수십 갈래로 뻗어나가는 내 인생을 본다. 그중 살아볼 수 있는 건 하나의 생뿐이다.


- 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배가 아프다는 아이를 눕여놓고 연신 아이의 배를 주무르며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프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를 키우는 나, 라는 정체성은 한 번도 내가 스스로 원했던 정체성이 아니었다. 나는 온 세상이 아이를 낳으라고 하면서도 온 세상이 아이 키우는 엄마를 혐오한다고 느낀다. 아니, 그것은 내 안의 혐오. 그밖에 수많은 혐오들이 나를 시기와 질투로 내몰고 자꾸만 배 아프게 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가 자주 아프더니 지금도.


아이의 배 위에 따뜻한 물수건을 담은 지퍼백을 올려놓는다. 아이는 잠이 들었다. 습관인지 각인인지 모르게, 아이의 낮잠 시간이면 자유 혹은 평화를 떠올린다. 이제 나의 아이는 다 커버려서 낮잠을 거의 자지 않는다. 아픈 아이를 옆에 두고 묘한 자유를 느낀다. 나는 나쁜 엄마일까.


책을 펼쳐든다. 프롤로그부터 좋아서 도무지 넘길 수가 없는 이슬아의 문장들. 또다시 배가 아프려고 하지만 어떤 좋음은 질투조차 할 수 없다.


언제부턴가 나의 글 속에는 ‘나는’이 많아졌다. 글쓰기를 가르치던 잠깐의 시절 금기시하던 ‘나는’이었다. 이후로는 일부러 많이 썼다. 쓰도록 내버려 뒀다. 방금 이 글 속 몇 개의 ‘나는’을 지웠다. 지운다고 거기에 없는 것은 아니니까.


정체성. 그 말이 문득 우습다. 내가 있는 자리가 내 정체성이다. 아이의 아픈 배를 주무르고, 자주 배가 아프고, 그래도 어떤 것은 너무 좋아서 질투조차 할 수 없는 내가 거기에 있다. 때론 부끄럽고 때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내가.


오후의 깊은 겨울 해가 거실 커튼 끄트머리에 걸렸다. 이 해가 다 넘어가면 익숙한 어둠과 추위. 그래도 낮동안 아이와 함께 설치한, 내 키만 한 트리에서는 반짝거리는 동그란 장식과 알조명들이 오늘을 비추겠지. 플라스틱 가루가 떨어지는 가짜 나무인데도 왠지 온기가 느껴져서 자꾸만 눈이 간다. 이만하면 ‘끝내주는 인생’*이다 싶다.




* 이슬아 작가의 산문집 <끝내주는 인생>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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