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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Jan 03. 2024

걸음마를 새로 배우는 기분


“그냥 살아도 살아져요. 뭣 때문에 그렇게 자기 인생을 늘 의식하는 거죠?”

- 은희경, <상속> 중에서



위 문장을 일 년 내내 벽에 붙여놓고 지냈다. 그 때문인지 그 덕분인지 그 어느 해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한 해였던 건 묘한 아이러니. ‘그냥’ 사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쇼핑도, 과시욕도, 완벽을 향한 집착마저도 내려놓아야 했다.


그동안 내 삶은 나를 설명하기 위한 상징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그 상징들을 여기저기서 주워 모아 여기저기에 퍼트리며 ’나 여기 있어! 내가 이렇게 살아있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어! 나는 이런 사람이야!’를 외쳐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몸부림이었다.

연말에 아이와 함께 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요괴 가오나시는 끝도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몸 속에 집어넣고 금은보화를 토해내며 사랑과 관심을, 관계를 갈구하였다. 돌아보니 그 모습이 바로 나였다. 결국 체하여 토해내고 비워내는 과정만이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지난해 두 권의 책을 토해냈다. 위벽을 긁는 아픔이 없지 않았지만 퍽 시원한 작업이었다고 고백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책을 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내가 붙들고 살았던 온갖 상징들은 그렇게 책이라는 물성이 되어 내 옆에 놓였다. 비워진 나는 다른 내가 되었다.


새해 첫 날인 오늘, 아이가 나에게 “엄마는 새해 계획이 뭐예요?”하고 물었다. 나는 “올 해에는 설거지를 미뤄놓지 않고 그때그때 할 거야. 그리고 가계부를 잘 쓸 거야.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을 거야.”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 대답을 꽤 오랫동안 준비했다. 가벼워진 내가 욕심내지 않고 이 걸음마를 이어가기 위한 방법들이다.

그렇다. 나는 걸음마를 새로 배우는 기분으로 지내고 있다. 어떠한 상징에 기대지 않고, 상징으로 치장하지 않고 나로 걷는 걸음마. 존재 그 자체를 발의 무게에 실어 내딛는 걸음이다. 서툴어 비틀대고 갈지자로 걸어도 고스란히,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내딛는 본연의 걸음으로 이번 한 해도 이어가고 싶다. 또다시 주어진 시간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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