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책은 아직이에요

오늘의 밥값 2쇄에 부쳐

by 수달씨


아직도 사람을 만나는 일이 다소 힘에 부치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조금씩 나간다. 모임이 지나간 뒤 집에 돌아오면 부끄러운 감정들이 몰려오긴 해도 - 그때 그 말은 왜 했어?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 일은 맡지 말았어야 했어. 역시 너무 나댔나. 조용히 있을 걸 그랬나...- 그럼에도 사람으로부터 얻는 교훈과 에너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책을 두 권 냈다는 사실을 아는 지인들을 만나면 종종 듣는 말이 있다. “다음 책은 언제 나와?” 그것은 결혼한 이들에게 아이는 언제 낳아? 첫 아이를 낳은 이들에게 둘째는 언제 낳아? 하는 것과 비슷한 류의 질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으레’ 하는 말. 그런데도 나는 그 순간 내 책이 대단히 인정이라도 받은 것처럼, 정말로 큰 기대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내 책을 기다리는 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짐짓 겸손을 떨며 “아직 준비 중이에요.” “돈이 없어서 아직이에요.” 하고는 손사래를 치는 것이다.


그 무렵 첫 책 <오늘의 밥값>의 1쇄 분량이 소진되어가고 있었다. 2쇄를 찍긴 해야 할 텐데 과연 팔릴까. 이미 여러 독립서점들에 입고되어 있는 분량들도 적지 않다. 몇 부를 찍어야 할까. 양장본으로 만들어보고 싶은데 돈이 없다. 그런 데다가 실제로 세 번째 책도 어느 정도 편집을 진행한 상태라 추후 여기에 들어갈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모든 것은 돈이다. 가끔 만나 차 마시는 동네 언니가 늘 하는 말 “아직 젊잖아. 너무 돈돈 거리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아직도 이런 말을 들어 놀랍다. 내 나이 마흔 중반에.) 그런 말을 듣고도 내 삶을 몰라서 그래요 속으로 생각할 뿐 나는 여전히 매사에 돈돈 거린다.

지난 12월 입고 방문 겸 북스테이로 찾았던 강화도 서점의 사장님이 타로점으로 봐준 컨설팅 아닌 컨설팅으로, 지난 책보다는 새 책에 투자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조언을 해주셨다. 무척 일리가 있는 말이라 거의 그렇게 마음을 정했었는데, 막상 마지막 재고 분량을 탈탈 털어 다 소진한 뒤로는 더 고민할 이유가 없어졌다. 솔드 아웃, 재고 없음 상태로 두는 것이 좀 더 ’있어‘ 보인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 못된다. 2쇄를 찍기로 했다. 대신 소량으로. 퀄리티를 일부 포기하고 디지털 인쇄로 가자. 1쇄도 그렇게 마음에 들게 나온 인쇄본이 아니었잖아. 대신에 기획 초기 생각했던 두께와 색감으로 돌아가서 다시 찍자. 내 마음은 계속해서 그렇게 말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 내 첫 책을 읽지 못한다. 가끔 어느 페이지의 한두 구절이나 한 챕터의 글 정도를 흘깃 엿보는 느낌으로 들여다보는데 그마저 쉽지 않다. 이제는 약도 안 먹고 지독한 완벽주의와 초조감도 내려놓고 제법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때를 들여다보기란 조심스럽다. 간신히 아물고 여문 상처가 벌어질까 무섭고, 어떤 부분은 치유된 게 아니라 봉인된 것일까 봐, 그것을 확인하는 길일까 봐 무섭다.

당시의 상태를 고려했을 때 그 글들을 책으로 박제해 세상에 공개할 마음을 먹었다니 대단하다. 그 점은 정말로 대단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뿐 아니라 ’우울 - 글쓰기 - 독립출판 ‘의 경로를 밟아가는 많은 이들은 희박한 에너지로 어떻게 그러고들 있는 걸까. 답은 하나다. 살려고 하는 일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의 문턱을 상상하거나 두드리거나 밟아본 이들이 살기 위해 선택한 일이다. 그래서 책을 사는 이보다 파는 이가 더 많아지고, 읽는 이보다 쓰는 이가 더 많아지고, 독립출판물을 취급하는 서점에는 우울과 싸우는 비슷비슷한 감정기록물들이 쌓여가지만 그 모든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세상이 정한 합리나,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살고자, 살아남고자 선택하는 일에는.


그래서 이제 2쇄가 나온다. 나에게는 세 번째 신간보다 더 의미가 값진 2쇄다. 이것은 살아남음의 증거다. 그리고 더 앞으로 나아감의 증거. 나를 부수고, 이전의 길을 부수고 나아가는 쇄빙선 같은 길이 아니라 쌓인 눈 위에 또 눈이 쌓이고, 녹았다가 더럽혀졌다가 다시 쌓이고, 희어진 세상에서 길을 잃어 뒤돌아갔다가 희미한 발자국의 흔적을 찾아 다시 앞으로 걸어오기를 반복하며 만들어가는, 정말로 더디 가는 길이다.

첫 책을 발간한 3년 전의 나로부터 얼마나 달라졌는지 얼마나 씩씩하고 단단해졌는지 보여주는 일보다, 그 출발을 기억하는 일이, 그때의 나를 보듬고 돌보아 미래로 데리고 가는 일이 지금의 내게는 조금 더 소중하다.

그러니 다음 책은 아직이에요.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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