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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Oct 23. 2020

취미는 공상

오늘의 밥값 9 / 그 시절 그 소녀


중고등학생 시절 나의 취미는 누워서 하는 공상이었다.   집에 있으면 마냥 머리 대고 누워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좋아하는 선생님 생각도 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상상도 하고. 돈이 많아 옷도 예쁘게 잘 입고 성격 소탈하고 인기도 많은 내가 되는, 하나 쓰잘데 없는 상상들.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취미였다. 그 시절 나는 베개에 머리를 댄 채 몇 시간이고, 새롭고 멋있는 나를 만들어냈다. 내 머릿속은 가난한 나의 집과 소심한 나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이십여 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생각이 많다. 도저히 이 꼬리 무는 생각들을 어떻게 끊어내야 할지 몰라 아등바등 중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나 생각이 많더니 지금까지 이렇게 괴롭히나 싶어 소녀시절의 나를 원망도 해본다.
그러다, 얼마 전 만난 한 동생이 "우리처럼 에너지가 적은 사람은 무조건 누워서 쉬어야 한대요."라고 말해준 것을 떠올렸다. 몸이라도 쉬어보자는 마음으로 전기요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워본다. 여전히 꼬리를 무는 이 생각 저 생각에 '봐, 별 소용없지' 싶다가 문득 이십여 년 전, 그 시절이 떠올랐다.
어쩌면, 누워서 공상에 빠져있던 그 시간들이 나를 살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어쩌지 못하는 가족의 돈문제로부터, 자꾸 꼬이기만 하고 내 맘 같지 않아 어렵기만 한 친구관계로부터... 공상은 유리 같은 나를 지켜주는 방패 같은 것이 아니었을지. 그 덕분에 힘겨운 사춘기 시절이었지만 요란하지 않게 버텨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때의 나를 조금은 다시 보게 되었다. 너, 생각보다 강하게 버텨냈구나.
이십 년 후의 나는 지금 전기요 위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사고 싶은 물건과, 먹고 싶은 간식과, 통장 잔고와 해야 할 집안일에 대한 생각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옆에서 일곱 살 아이가 자신이 만든 변신로봇을 자랑하려고 자꾸만 엄마 엄마 불러댄다. 따뜻하고 귀찮은 서른아홉의 밤. 왠지 이런 기분이라면, 이런 좋음이라면 조금 덜 슬플 수 있을 것 같다.



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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