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잠에서 깨어나

오늘의 밥값 16 / 절기의 힘

by 수달씨


겨울이면 생존 모드에 들어간다. 날이 추워지면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지고 몸은 할 일을 기억해낸다.

땔감을 준비하고, 집안 곳곳에 비닐을 치고 보일러를 점검하고 기름을 채워 넣는다. 더울 때 하지 못했던 창고의 묵은 짐 정리, 농사짓던 마당과 꽃밭 갈무리도 슬슬 해놓아야 한다.

겨울에는 단순해진다. 오늘 하루도 살아냈구나 하며 서로를 도닥거리는 계절. 두툼한 패딩점퍼와 털부츠 하나로 버티는 계절이다.

땡감을 매달아 곶감을 만드는 것 같은 겨울의 잔재미를 떠올려본다. 유리병에 담아 먹던 더치커피 대신 뜨거운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먹게 되겠지.


여름 내내 질병과 우울에 시달렸다. 들끓는 욕망과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실대던 몸과 마음. 쉼 없이 뜨거운 태양도 껌처럼 늘어지게 만드는 축축한 공기도 기세 등등하던 벌레와 모기도 온통 나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여름 잔고는 텅 비어버렸는데. 어제까지 그랬는데.


입추가 하루 지난 8월, 새파랗게 투명한 하늘과 깜짝 놀랄 만큼 찬 아침 공기에 세포 하나가 잠에서 깨어난다. 절기는 무섭도록 정확하다. 잎사귀 위로 떨어진 이슬 한 방울처럼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공기에 눈 뜬 아침. 나는 긴 겨울잠을 자고 나와 처음 해를 본 곰처럼 말간 하늘을 올려다본다. 긴 숨을 들이켠다. 폐에 새 숨을 채운다. 살아남았구나. 이 여름을 살아냈구나.


202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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