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편의점 파라솔 아래 앉아

오늘의 밥값 03 /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시간

by 수달씨

부모님과 언니네 식구들이 오기로 한 날. 일찍부터 일어나 청소를 휘둘러 마치고 잠깐 편의점에 나왔다. 조카들 챙겨줄 어린이날 용돈을 인출하고 빨대 커피 하나 사서 벤치로 향한다.

비 갠 다음날의 습기 머금은 바람과 눈이 시린 초록으로 둘러싸인 마을 입구. 이 근방에서 가장 핫플레이스인 이 초등학교 앞 사거리 편의점에 앉아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넉넉해진다. 고향도 아닌데 고향에 돌아온 듯 의기양양한 기분.

이 지역으로 이사 오기 몇 달 전부터 우리 가족은 이 편의점을 내비게이션에 찍고 서울 강동구에서부터 드라이브를 다녔었다. 주로 아이 재우기 용 밤 드라이브라서 경치도 못 보고 어두컴컴한 지방도를 삼십 분 내달리면 자그마한 시골 읍내와 만나게 된다. 이 곳에 들어서면 항상 안심할 수 있었다. 떡집이라던지 철물점, 분식집과 작은 술집 같은 어쩐지 사람 냄새나는 가게들이 모여있는 읍내라면 읍내.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이 사거리 편의점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아이를 조금 더 재우거나, 깨워서 킨더조이 초콜릿 같은 것을 쥐어주고 우리는 빨대 커피를 사 먹었다. 몇 달 후 이 곳으로 이사 온 뒤 세 식구가 편의점에 나올 때마다 그때를 회상한다. "우리가 정말로 여기에서 살게 되다니 믿기지 않아!"

실은 막상 이사 온 뒤 그때의 밤 드라이브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동네에서 쉰 적이 있었나 싶다. 생활한다는 것은 역시 조금 다른 문제라서, 계속되는 할 일 또 할 일에 동네를 느낄 겨를이 많지 않다. 반백수인 이 시기에도 청소와 빨래 같은 끝도 없는 집안일과 육아와 잡다한 생각들과 마당 돌보기. 일에 순서를 세우고 계획적으로 해나가는 습관에 눈 돌릴 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온 건 아닌지. 계획에 없던 잠깐의 여유에 편의점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이 든다.

겨울에는 한산한 이 동네 도로도 상춘기 주말이면 나들이 가는 차량들로 북적인다. 나도 한때는 외지인으로 저 행렬에 끼어있었으려나. 이 곳에 이사오지 않았다면 주말마다 차를 끌고 자연을 찾아다녔겠지.

파라솔 아래에 앉아 산에서 내려오는 선선한 바람을 마시며 왠지 다시 의기양양해졌다. 나 홀로 누리는 진정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시간. 우리에겐 때로 '쉬기 위해' 쉬는 것이 아닌, 목적어 없이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비록 습관을 못 버리고 이렇게 메모장을 열어 글을 적고 있긴 하지만, 이건 이 바람과 이 공기를 기억하는 나만의 방법이라 어쩔 수 없는 걸로 하자.



20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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