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초록의 노래

오늘의 밥값 04 / 초록이 초록초록

by 수달씨


초록은 다양하다. 어떻게 초록이라는 말 한 가지로 퉁칠 수가 있겠는가. 어떤 색이름이 그렇듯 초록은 하나가 아니다. 오죽하면 산골에 살며 그림을 그리는 한 작가는 '베리 그린'*이라는 연작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을까. 눈 앞에 펼쳐진 이 다채로운 초록을 보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것들을 자랑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긴 겨울을 보낸 뒤 만나는 초록을 나는 한없이 예찬한다. "초록이 초록초록해!" 라고 지긋지긋하도록 말할 수 있다.

4월의 초록은 순하다. 나무마다 여린 순들이 연둣빛으로 올라오면 우리가 겨우내 본 그 산의 모습이 더 이상 아니다. 뾰족한 가시 같던 산의 실루엣이 아지랑이처럼 뭉게뭉게 하다. 마치 시력이 아직 확보되지 않은 어린 아기가 처음 만나는 세상이 이러할까. 사철 푸른 진녹색의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새롭게 피어나는 연두와 연분홍과 개나리 노랑이 사이좋게 어우러져 정다운 봄의 산을 보노라면 그 매섭던 추위는 잊어버리고 사계절이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혹독한 겨울 끝에 맞는 선물 같다.

반면 여름의 초입에 만나는 산은 뭐랄까 좀 더 우악스럽다. 이제야말로 누가 더 선명한지 뽐내는 초록의 잔치에 눈이 시리다.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사춘기 소년 같은 터질듯한 초록. 와글와글 떠드는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 이 미친 초록의 노래에 언제나 넋을 잃고 만다.
비 온 뒤의 초록, 비를 맞고 있는 초록,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습기 가득한 초록... 매일 다른 모습으로 가을이 오기 전까지 숨 쉬고 변화하는 이 초록의 기운 속에서 나는 함께 젊어짐을 느낀다. 초록을 즐기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믿는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오늘처럼 퇴촌에서 서울로 내달리는 13-2번 버스에서, 두어 번은 출퇴근길인 45번 국도 강변을 따라 사계절을 본다. 70퍼센트가 산이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색은 역시 초록일 게다. 하지만 긴 겨울 뒤에라야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어 언제나 반가운 색. 달리는 버스의 창을 열어 한껏 마시면 내 피에도 초록이 흐를 것 만 같아서 큼큼거리며 내음을 맡아본다. 그리하여 오늘의 밥값은 초록, 너로 정했다!



2020.05.06


* 산골에서 고양이와 함께 살며 농사짓고 그림 그리는 나의 롤모델, 노석미 작가. 2016-2017년 <Very Green>이라는 주제의 연작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최근 <매우 초록>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이전 05화동네 편의점 파라솔 아래 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