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밥값 02 / 구옥의 계절은 다르게 흐른다
반팔 차림으로 아이스커피를 먹는 계절이 왔다. 오후 해를 품은 바람이 선선히 드는 부엌 창가에 앉아 오늘의 밥값을 적는다. 바야흐로 5월. 귀신같이 5월의 첫날이 되자마자 보일러를 틀지 않고 아침을 맞았단 걸 떠올린다. 아, 이제 긴 겨울이 지나갔구나.
바로 어제까지 방바닥이 서근서근해 밤엔 보일러를 틀었었다. 아침에는 전기장판 위에서 식은 몸을 이불로 둘둘 감아야 했던 시골집의 지독한 추위. 구옥의 계절은 다르게 흐른다. 일 년의 절반은 겨울이라고 보면 된다.
5월이 되어서 겨우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과 소통을 시작한다. 단열을 위해 창마다 붙여둔 뽁뽁이 비닐도 후련하게 걷어야 한다. 잠자리마다 깔린 온수매트도 치울 때가 됐다. 겨우내 단벌로 버틴 패딩점퍼와 돌려가며 입은 니트 두어 벌도 이제 마지막 세탁을 마치면 상자로 들어갈 것이다. 겨울의 흔적을 걷어내는 일은 겨울을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품이 든다.
우리 집 가훈은 'Winter is coming*'이라고 말할 정도로 시골 초짜들의 겨울 준비는 유난하다. 9월이 되고 농부들이 가을 농사를 준비할 때 우리 가족은 벌써부터 올 겨울을 어떻게 버텨내고 생존할 것인가를 토론한다. 이번엔 뽁뽁이를 3겹으로 준비하자던가, 가정용 등유와 장작이 충분한지 점검해야 한다던가, 외풍을 차단하기 위한 온갖 묘수들을 고민하며 다이소의 신상 방한용품을 둘러본다.
이사 오자마자 맞이한 첫겨울을 호되게 치렀던지라 두 번째 겨울은 단단히 준비했다. 다행히도 많이 춥지 않은 겨울이라 그런대로 무난하게 버텼다. 하지만 3월이 가고 4월이 되어도 바닥의 냉기와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바깥을 나가야만 봄이 온 줄 알았던 시간들. 그 시간을 보내고 이제 겨우 5월을 맞았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바깥과 통하는 집에서의 생활. 계절을 눈과 귀뿐만 아니라 오감으로 확인한다. 나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감성적으로나 인문학적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시골살이. 나는 세상을 처음 경험하는 아이처럼 모든 감각이 새롭고 하루하루가 놀랍다.
드물게 미세먼지 없이 깨끗한 봄 밤, 마당 한가운데 서면 머리 위로 북두칠성이 커다랗게 펼쳐지는 시골집. 그런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큰 우주를 가진 사람인 마냥 벅차다. 가진 것이 없고 먹고살기는 팍팍하고 매일 조금쯤 우울해도 이 시골집을 생각하면 커다란 선물을 받은 것 같아서, 모든 계절이 선물과도 같아서,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2020.05.01
*미국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