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의 생명은 나와 똑같은 샘물에서 흘러온 것이다

by 수담
누구를위하여종은울리나(24.9.21서부도서관).jpg

이어령 선생의 이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떠올리며 쓰신 이 문장들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어요.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내 대륙 안의 모래가, 흙이 바다로 휩쓸려 간다는 의미다."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조금 당황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의 죽음이 제게 그렇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느껴본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뉴스에서 들려오는 사고 소식이나 멀리서 일어나는 전쟁 이야기들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죠.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코로나를 겪으면서 더욱 절실히 느꼈어요. 지구 반대편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우리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았을 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로 연결되어 있구나.


강연장에서 만나는 분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하세요. "선생님, 요즘 세상이 너무 각박해진 것 같아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지하철에서 쓰러진 사람이 있어도 모른 척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럴 때마다 이어령 선생의 이 글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섬처럼 살게 되었을까요? 존 던의 유명한 시구처럼 "누구도 섬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현실은 정반대인 듯해요. 모두가 자신만의 섬에서 살아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한 할머니가 계단에서 넘어지셨어요.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더군요. 저도 처음엔 '누군가 도와드리겠지' 하면서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어령 선생의 글이 떠올랐어요. "그의 고통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그 말씀이요.


결국 할머니를 도와드렸는데, 그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치 끊어져 있던 연결고리가 다시 이어진 느낌이었어요. 할머니의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며, 우리가 정말 같은 샘물에서 흘러온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로버트 조던은 자신과 관계없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야 했을까요? 헤밍웨이가 그린 이 젊은 미국인의 선택을 이해하기까지 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이상주의적인 열정이나 모험심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로버트 조던의 선택은 인간이 가진 가장 본능적인 연대감의 발현이 아닐까요. 스페인에서 일어나는 파시즘과의 투쟁이 결국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직감했던 거죠. 지금 거기서 자유가 무너지면, 언젠가는 자신이 사는 곳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최근에 지역 봉사활동에 참여해 봤는데,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시작했습니다. 막상 해보니 제가 더 많은 것을 얻더군요. 도움을 주러 갔다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온 느낌이었어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한다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더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일이구나.


"그의 생명은 나와 똑같은 샘물에서 흘러온 것이다"라는 구절이 특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종교나 철학을 떠나서, 우리는 정말 같은 근원에서 나온 존재들이니까요. 같은 지구에서 태어나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물을 마시며 살아가는 존재들이요.


요즘 뉴스를 보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자주 느낍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나라 물가에 영향을 주고, 중동의 분쟁이 유가를 좌우하고, 미국의 일방적인 관세부과. 경제적으로만 연결된 게 아닙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절망이 우리 마음에도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연결감을 자꾸 잊어버릴까요? 아마도 일상의 바쁨 때문일 겁니다. 내 일만으로도 버거운데, 남의 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때 우리 자신도 더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합니다. 종은 죽은 자를 위해서만 울리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 모두를 위해 울리는 거예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죽음이 우리 모두의 상실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요.


현대 사회에서 이런 메시지가 더욱 절실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개별화되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SNS를 통해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하지만, 정작 옆집 사람과는 담을 쌓고 살죠. 기술적으로는 더 가까워졌지만, 마음으로는 더 멀어진 듯합니다.


하지만 희망적인 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연결감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해가 일어나면 자발적으로 도움의 손길이 모이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캠페인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로버트 조던의 정신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결국 이어령 선생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런 연결감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요.


오늘도 어디선가 종이 울리고 있을 겁니다. 그 종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어떨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울리는 소리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홀로 선 둘이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