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오후, 같은 카페.
한도윤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셔츠는 더 흐트러져 있었다. 첫 두 단추가 풀려 있었고, 머리는 손으로 여러 번 쓸어넘긴 흔적이역력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윤서하가 들어왔다.
서하도 긴장한 표정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도윤 앞에 앉자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감정을 복원할 수 있습니다."
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주도, 인사도 없었다.
서하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지워진 기억을 되돌릴 수 있다고요?"
"감정만입니다." 도윤이 정정했다. "기억은 아니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을 되찾을 수 있어요."
"어떻게요?"
"Recall Sequence." 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삭제된 감정 코드를 역추적하는 기술입니다. 금지되어 있지만... 가능합니다."
서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카페의 소음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만 침묵이 흘렀다.
"그럼 저는 당신을 다시 사랑할 수 있나요?"
도윤의 턱선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얼마나요?"
"뇌가 감당 못 할 수도 있어요." 도윤의 눈동자가 떨렸다.
"3년치 감정이 한꺼번에 돌아오면... 시스템이 과부하될 수 있습니다."
서하는 도윤을 똑바로 봤다.
"괜찮아요. 당신을 기억하고 싶어요. 정확하게는, 당신을 사랑했던 그 마음을요."
도윤의 손이 테이블을 쥐었다.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
"서하 씨..."
"편집사님." 서하가 그의 손을 덮었다. "저 혼자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함께요."
도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
밤 11시. 레미니언스 지하 3층.
일반 상담실과는 달랐다. 천장이 낮고 어두웠다.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붉은 경고등이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공기가 차갑고 무거웠다.
서한비가 콘솔 앞에 서 있었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이건 금지된 기술입니다, 한 편집사."
도윤이 문을 닫으며 들어왔다. 서하가 그 뒤를 따랐다.
"알고 있습니다."
"3년 전에도 실패했잖아요." 한비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고요?"
"이번엔 다릅니다." 도윤이 말했다. "제가 직접 모니터링하겠습니다."
한비는 서하를 봤다. 눈빛이 복잡했다.
"윤서하 씨, 정말 하시겠어요? 죽을 수도 있어요."
서하는 망설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기억 없이 사는 것보다 나아요."
도윤이 한비 옆으로 갔다.
"책임은 제가 집니다."
한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준비하죠."
중앙에 특수 의자가 있었다. 일반 상담실의 의자보다 훨씬 복잡했다.
센서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두꺼운 케이블이 기계로 연결되어있었다.
서하가 앉았다. 의자가 차가웠다. 등을 통해 냉기가 스며들었다.
도윤이 다가와 헤드셋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서하의 이마에, 관자놀이에, 뒤통수에 센서를 부착했다. 금속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서하가 움찔했다.
"편집사님."
서하가 불렀다.
"네?"
"고마워요.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셔서."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지막 센서를 부착하는 데만 집중했다.
한비의 타자 소리만 실내에 울렸다. 기계가 낮게 웅웅거렸다.
......................
"시스템 온라인."
한비의 목소리. 홀로그램 화면이 서하 앞에 떴다. 붉은 파동이 나타났다.
봉인된 감정 코드들. 3년간 잠들어 있던 것들.
"시작합니다." 도윤이 말했다. "눈을 감으세요."
서하가 눈을 감았다.
"Recall Sequence 초기화." AI의 차가운 음성. "감정 코드 역추적 시작."
어둠.
그리고 빛이 터졌다.
###
편집실. 밝은 조명. 도윤의 손이 서하의 손을 잡는다. 따뜻하다.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그의 목소리. 부드럽고 단단하다.
###
레미니언스 옥상. 석양이 두 사람을 물들인다.
"서하야, 난 네가 좋아."
"편집사님, 그건..."
"알아. 규정 위반이지. 하지만 참을 수가 없어."
도윤이 서하의 볼을 감싼다. 키스. 첫 키스. 세상이 멈춘다.
###
몽타주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
함께 웃는다. 손을 잡고 걷는다. 그의 어깨에 기댄다.
"사랑해."
"나도."
행복. 순수한 행복.
###
경보음.
붉은 불빛이 편집실을 채운다. 서하의 몸이 경련한다. 쓰러진다.
"서하야! 안 돼!"
도윤이 절규한다. 의료진이 달려온다. 혼란. 공포.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도윤의 얼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
###
병원 복도. 차가운 형광등.
"도윤아, 미안해. 난 떠날게."
"무슨 소리야? 왜?"
"내가 당신 인생을 망치고 있어. 이건 안 돼."
서하가 돌아선다. 도윤이 붙잡는다.
"가지 마... 제발..."
하지만 서하는 그의 손을 뿌리친다. 걷는다. 멀어진다.
###
현실.
서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눈을 감은 채로.
"도윤아..."
속삭임.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가슴이 뜨겁다. 눈물이 뜨겁다. 사랑이 돌아온다. 3년치가 한꺼번에.
......................
삐
경고음 하나.
한비가 화면을 봤다. 눈썹이 올라갔다.
"뇌파 수치 상승 중."
삐- 삐- 삐
경고음이 늘어났다. 화면에 붉은 메시지가 폭발했다.
"감정 과부하! 뇌파 수치 위험! 즉시 중단을 권장합니다!"
서하의 몸이 떨렸다. 경련이 시작됐다.
"중단!" 도윤이 소리쳤다. "지금 당장!"
한비의 손이 키보드 위를 날았다. 하지만 화면은 멈추지 않았다.
"시스템이 응답하지 않아요!"
서하의 코에서 핏줄기가 흘렀다.
"도윤아..." 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보여... 다 보여..."
도윤이 달려갔다. 헤드셋을 잡았다. 강제로 벗기려 했다.
찌직
전기 충격. 도윤이 뒤로 튕겨났다. 바닥에 넘어졌다.
서하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눈이 반쯤 떠진 채로.
"안 돼, 서하야!"
도윤이 기어갔다. 서하를 안았다. 차갑다. 너무 차갑다.
한비가 비상 버튼을 눌렀다.
"응급팀 지하 3층으로! 지금 당장!"
타는 냄새가 났다. 경보음이 귀를 찢었다. 서하의 손이 축 늘어졌다.
......................
병원 응급실. 새벽 3시.
유리창 너머로 의료진이 보였다. 서하 위로 모여들었다. 급하게 움직였다.
도윤은 유리에 손을 댔다. 떨렸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한 편집사..."
한비의 목소리.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의사가 나왔다. 표정이 무거웠다.
"보호자분이십니까?"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환자분 상태가 매우 위중합니다. 뇌 손상이 심각하고..."
의사가 말을 멈췄다.
"뇌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생각이 멈췄다.
숨이 멎었다.
도윤의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벽에 기댔다.
한비가 그를 부축했다.
"한 편집사, 정신 차려요."
도윤은 천천히 걸었다. 응급실 문 앞으로. 문을 열었다. 들어갔다.
침대.
서하가 누워 있었다. 온갖 기계에 연결되어 있었다. 산소 마스크. 링거. 모니터.
규칙적인 소리만 들렸다.
도윤이 다가갔다. 서하의 손을 잡았다.
차갑다.
"내가 또..."
목소리가 깨졌다.
"내가 또 네게 이런 짓을..."
눈물이 떨어졌다. 서하의 손 위로.
도윤은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서하의 손을 이마에 댔다. 차가운 손. 죽어가는 손.
"미안해... 미안해..."
오열했다.
어둠이 내렸다. 소리만 남았다.
규칙적인 기계음.
생명의 소리.
아니, 죽음을 막고 있는 소리.
삐- 삐- 삐-
[다음 화에 계속]
#SF로맨스 #기억상실 #재회로맨스 #근미래 #감정미스터리 #운명적사랑 #힐링웹소설 #완결웹소설 #12화완결 #먹먹한로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