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하는 테이블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레미니언스에서 두 블록 떨어진 카페. 창가 자리. 서하는 라테를 주문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컵 표면에서 피어오르는 김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은 저를 아나요?'
어젯밤 전화 속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낮고 떨리던 목소리. 평소의 차갑던 한도윤과는 달랐다.
문이 열렸다.
서하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한도윤이 들어왔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검은 셔츠의 첫 단추가 풀려 있었고, 머리는 평소처럼 완벽하게 넘어가 있지 않았다. 미세하게 흐트러진 모습. 마치 잠을 제대로 못 잔 사람 같았다.
도윤이 서하 앞에 앉았다. 그의 손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손등에 푸른 핏줄이 보였다.
"올 줄 몰랐습니다."
도윤의 첫마디였다.
"...전 편집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궁금했어요."
서하는 라테 잔을 쥐었다. 따뜻했다. 손이 떨렸다. 컵 안에서 작은 파문이 일었다.
도윤이 서하를 봤다. 정확히 5초.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과거에 저를 알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서하의 손이 더 떨렸다. 라테 표면의 파문이 커졌다.
"우리는 연인이었어요. 3년 전에."
컵을 놓는 소리가 카페에 울렸다. 서하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커피가 약간 흔들리며 받침에 얼룩을 남겼다.
"거짓말..."
서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도윤의 얼굴 반쪽이 빛에 물들었다.
"제가 당신의 담당 편집사였습니다." 도윤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실험 중 사고가 있었고,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서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꽉 쥐었다.
"그래서... 그래서 계속 꿈을 꿨던 거군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손을 잡아주던 사람. 따뜻한 목소리. 웃던 얼굴. 모든 것이 이제 이해됐다.
......................
"그럼 제가 꾼 꿈들은...?"
서하가 물었다. 목소리에 떨림이 섞였다.
"당신의 무의식에 남은 기억 파편입니다." 도윤이 대답했다. "감정은 지워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어요."
"손을 잡아주던 사람이... 당신이었나요?"
침묵.
도윤이 창밖을 봤다가 다시 서하를 봤다.
"...아마도."
서하의 눈에 무언가 차올랐다. 눈물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럼 당신은 왜 저를 기억 못 하는 거죠?"
"저도 기억을 지웠으니까요."
서하의 눈이 커졌다.
"왜요? 당신도 아팠나요?"
도윤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당신을 아프게 했으니까요."
서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흘리지 않았다. 그저 반짝이기만 했다.
"우린 정말 바보 같네요." 서하가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서로를 위해 기억을 지우다니."
도윤의 눈썹이 살짝 모였다. 입술을 꽉 눌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하는 라테 잔을 다시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쓰디쓴 맛이 혀에 남았다.
"근데 이상한 게 있어요."
"뭡니까?"
"당신을 보면... 마음이 편해져요."
도윤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톡, 톡, 톡.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기억은 없는데 감정만 남은 것 같아요. 마치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았던 것처럼." 서하가 도윤을 봤다.
"혹시 당신도... 저를 볼 때 뭔가 느껴지세요?"
침묵이 흘렀다. 카페 안 음악 소리만 들렸다.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낮았다. "하지만 당신을 보면 자꾸 생각이 나려고 합니다."
서하는 미소 지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한 줄 흘렀다.
......................
서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땠어?"
"민혁아..." 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 그 사람이랑 연인이었대."
전화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알고 있었어. 미안, 말 못 해줘서."
"괜찮아." 서하가 말했다. "이제 알았으니까."
전화를 끊고, 서하는 거실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를 사랑했다고? 3년 전에?
무언가 확인하고 싶었다.
서하는 침실 옷장을 열었다. 맨 위 선반에 오래된 박스가 있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꺼내서 열었다. 낡은 사진들, 영화 표, 그리고...
일기장.
표지에 적힌 글씨: "2038-2039"
서하는 떨리는 손으로 일기를 펼쳤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첫 페이지.
[2038.11.03]
오늘 담당 편집사님을 처음 만났다. 한도윤. 차갑고 무표정한 사람. 근데... 눈이 슬퍼 보였다.
왠지 내가 그 눈을 웃게 만들고 싶다.
서하는 숨이 멎었다. 이게 내 글씨다. 내가 쓴 거다.
페이지를 넘겼다.
[2039.01.14]
도윤 씨가 처음으로 웃었다. 실험이 조금 성공했을 때였다. 내가 '와, 신기해요!'라고 했더니 그가 작게 웃으면서 '다행이네요'라고 했다. 그 미소를 평생 기억하고 싶다.
서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일기장 위로. 글자가 번졌다.
계속 넘겼다.
[2039.04.27]
나는 도윤 씨를 사랑한다. 편집사와 의뢰인이라는 관계를 넘어서. 이건 복원된 감정이 아니다.
진짜 사랑이다. 확실하다.
글씨체가 떨려 있었다. 당시의 서하도 떨렸던 걸까. 고백을 적으면서.
마지막 페이지.
[2039.07.18]
오늘 사고가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도윤 씨가 울고 있었다. 나 때문에 그가 고통받는다.
나 때문에 그가 편집사 자격을 잃을 수도 있다. ...떠나야겠다. 그를 지키기 위해.
서하는 일기를 가슴에 안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게... 내 마음이었구나."
속삭임이 빈 방에 흩어졌다.
"지워진 게 아니라 숨겨진 거였어."
......................
서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부은 눈. 젖은 뺨. 하지만 표정은 밝았다. 처음으로 뭔가 확실해진 기분이었다.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빠르고 강하게.
"지워진 사랑이 다시 자라나고 있어."
서하는 거울 속 자신에게 말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사라진 적이 없었는지도 몰라. 기억은 지워졌어도, 내 심장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어."
핸드폰을 꺼냈다. 도윤의 연락처를 열었다.
메시지를 입력했다. 지웠다. 다시 썼다. 또 지웠다.
세 번째 시도.
[ 편집사님, 만날 수 있을까요?]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서 멈췄다. 망설여졌다. 하지만 심장은 뛰고 있었다.
한 줄을 더 썼다.
[제가 기억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전송.
메시지가 날아갔다. 서하는 창밖을 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눈물이 또 흘렀다. 하지만 이번엔 미소 지으며 울었다.
......................
레미니언스 62층, 한도윤의 사무실.
핸드폰이 울렸다.
도윤은 화면을 봤다. 메시지 알림.
[편집사님, 만날 수 있을까요?
[제가 기억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도윤은 메시지를 오래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 변화가 일어났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미소.
3년 만의 진짜 미소였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떠돌았다.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무엇을 써야 할까? 감정이 돌아오고 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봉인이 풀리고 있었다.
그는 짧게 답장을 썼다.
[좋습니다. 내일 같은 곳에서.]
전송.
도윤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서울의 야경이 반짝였다. 가슴 한가운데서 무언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도... 기억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말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빈 사무실에는 그의 미소만 남았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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