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파편들

by 수담

기억이 밀려왔다.


2039년 봄. 레미니언스 상담실.


창으로 따뜻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도윤은 30세였다. 지금처럼 차갑지 않았다.


무표정했지만 눈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문이 열렸다. 한 여자가 들어왔다.


윤서하. 27세. 긴 생머리, 큰 눈. 하지만 그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앉으십시오."


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지금의 그와는 달랐다.


서하가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감정을 되살리고 싶어요."


서하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전 너무 오랫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어떤 계기로 감정을 잃으셨습니까?"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서하가 창밖을 봤다. "어느 날부터 세상이 회색이 됐어요."


도윤은 그녀를 봤다. 감정이 없는데도 슬퍼 보이는 눈. 묘한 아이러니였다.


"감정 복원은 시도해볼 수 있지만," 도윤이 신중하게 말했다. "아직 실험 단계입니다. 위험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서하가 처음으로 그를 똑바로 봤다. "전 다시 살고 싶어요. 웃고 싶고, 울고 싶어요."


도윤의 가슴이 조여왔다. 그 간절함. 감정 없는 목소리 속에 숨겨진 간절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하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2개월이 흘렀다.


"오늘은 기분이 어떠세요?"


도윤이 물었다. 같은 상담실. 하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


"...따뜻해요."


서하의 목소리에 변화가 있었다. 미세한 떨림. 감정의 시작.


"감정 복원이 잘 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니에요." 서하가 도윤을 봤다. 눈에 빛이 돌았다. "당신 옆에 있으면 따뜻한 거예요."


도윤이 당황했다.


"그건... 치료 효과일 겁니다."


"편집사님은 제가 처음 만난 날부터 계속 슬퍼 보였어요."


"...제가요?"


"네." 서하가 미소 지었다. 첫 번째 미소였다. "마치 감정을 느끼는 게 고통스러운 사람 같아요."


도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당신이 제게 감정을 돌려주려 하고 있어요. 아이러니하죠?"


침묵이 흘렀다.


어느 날, 실험이 성공했다.


서하의 감정 수치가 정상 범위에 들어왔다. 화면에 초록색 신호가 떴다.


"와, 신기해요!"


서하가 웃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눈이 반짝였다. 뺨이 붉어졌다.


도윤도 웃었다. 작게, 하지만 진심으로.


"고마워요, 편집사님."


"...도윤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서하의 손이 도윤의 손에 스쳤다. 따뜻했다.


......................


2039년 6월.


"준비되셨습니까?"


도윤이 물었다. 더 깊은 감정 복원 실험. 위험했지만 서하가 원했다.


"네."


헤드셋 착용. 시스템 가동.


처음엔 순조로웠다. 서하가 미소 지었다. 눈물도 흘렀다. 감정이 살아났다.


그런데.



경고음.


"도윤 씨..." 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무 많아요... 감정이 너무..."


뇌파 수치 급상승. 붉은 경고등.


"서하야!"


서하의 몸이 경련했다. 눈이 뒤집혔다.


쓰러졌다.


"서하야! 눈 떠!"


도윤이 절규했다. 응급팀이 달려왔다. 혼란. 공포.


병원.


일주일.


도윤은 서하 옆을 떠나지 않았다.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거울을 봤다. 수척한 얼굴. 혈관이 선명한 눈.


그리고 8일째 아침.


"...도윤 씨?"


서하가 눈을 떴다.


도윤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서하야... 미안해... 내가... 내가 너를..."


"괜찮아요."


"괜찮을 리 없어!" 도윤이 소리쳤다. "내가 너를 죽일 뻔했어!"


서하가 도윤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살았잖아요. 그리고..." 그녀가 미소 지었다. "느껴져요."


"뭐가?"


"사랑.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이요."


도윤의 숨이 멎었다.


"서하야..."


"다시 시도해요. 이번엔 성공할 거예요."


"안 돼. 너무 위험해."


"전 당신과 함께라면 괜찮아요." 서하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사랑하니까요."


그 순간 도윤도 알았다. 자신 역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


눈을 떴다.


현실이 돌아왔다. 병실. 의식 없는 서하. 기계음.


창밖으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회색 빛이 방을 채웠다.


도윤은 서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차가웠다.


'내가 두 번이나 널 이렇게 만들었어.'


목소리 없는 독백.


'첫 번째는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내가 널 사랑했던 기억조차 지워버렸기 때문이야.'


가슴이 무너졌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사라지는 게 나을까?'


'하지만...'


순간.


서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


도윤이 놀라서 그녀를 봤다.


서하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떠나지 마."


희미한 목소리. 하지만 분명했다.


도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안 떠나." 그가 속삭였다. "절대 안 떠나."


......................


문이 열렸다.


한비가 급하게 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했다.


"한 편집사..."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한비가 태블릿을 보여줬다. 화면에는 레미니언스 시스템 전체가 표시되어 있었다.


붉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시스템이 폭주하고 있어요."


"무슨 뜻입니까?"


"서하 씨의 감정 코드가..." 한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트워크 전체에 퍼지고 있어요."


도윤이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그녀의 사랑이..." 한비가 화면을 가리켰다. 빨간색 파동이 시스템 전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너무 강해서 시스템이 감당을 못 하는 거예요."


도윤은 화면을 봤다.


서하의 감정 코드가 디지털 바이러스처럼 증식하고 있었다.


레미니언스의 모든 서버를, 모든 데이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레미니언스 전체가 붕괴됩니다." 한비가 말했다.


"저장된 모든 기억, 모든 감정이 폭발할 거예요."


도윤은 서하를 봤다.


의식 없이 누워 있는 그녀.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시스템 전체를 집어삼킬 만큼 강한 사랑.


도윤은 주먹을 쥐었다.


"방법이 있습니까?"


한비가 그를 봤다. 눈빛이 복잡했다.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해야 해요."


"무엇입니까?"


한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직접 링크. 당신이 그녀의 감정을 대신 감당하는 거예요."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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