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사람(완결)

by 수담

서하가 문을 열었다.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카페 안은 따뜻했다. 부드러운 조명, 잔잔한 음악, 커피 향.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한도윤이었다.


서하의 심장이 멈췄다. 아니, 미친 듯이 뛰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옆 의자를 붙잡았다.


"...도윤 씨?"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도윤이 서하를 봤다.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감정이 지워진 눈. 서하가 너무나 잘 아는 그 눈.


"...누구시죠?"


서하는 알고 있었다. 한비가 말했으니까. 하지만 직접 듣는 것은 달랐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저... 윤서하예요." 서하가 한 걸음 다가갔다. "저 기억 안 나세요?"


도윤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눈물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웃음도 났다. 살아있었다. 그가 살아있었다.


"우리... 알던 사이였어요."


도윤이 당황했다. "그런가요? 죄송합니다만, 전혀 기억이..."


"괜찮아요." 서하가 눈물을 닦았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왜 우세요?"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니에요." 서하가 미소 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는 천천히 도윤 맞은편에 앉았다. 손이 떨렸지만, 참았다. 살아있구나.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


침묵이 흘렀다.


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세요?"


"네."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3개월 전에 병원에서 깨어났는데, 그 전 기억이 거의 없어요. 제 이름이나 기본적인 것들은 알지만... 사람들,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 어디서 살았는지 같은 건 전부 사라졌어요."


"레미니언스는요?" 서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 편집은?"


"레미니언스라는 회사 이름은 뉴스에서 봤어요. 제가 거기서 일했다고 하더군요." 도윤이 창밖을 봤다.


"하지만 기억은 없어요. 아무것도."


"저도요? 저도 기억 안 나세요?"


도윤이 서하를 봤다. "...죄송해요."


"사과하지 마세요." 서하가 웃었다. 눈물이 또 났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도윤은 이상했다. 이 여자는 울고 있는데, 왜 웃고 있을까.


그리고 왜 자신은 이 낯선 사람 앞에서 이렇게 편할까.


"우리는... 어떤 사이였나요?"


서하가 잠시 망설였다. "...소중한 사이였어요."


"그런데 왜 3개월 동안 찾지 않으셨어요?"


"찾았어요." 서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매일. 오늘 처음 본 거예요."


도윤은 가슴이 아팠다. 왜 아픈지 모르겠지만, 아팠다.


"...죄송합니다. 제가 기억했어야 하는데."


서하는 도윤을 봤다. 말투가 똑같았다. 손을 주머니에 넣는 습관도 그대로였다.


기억은 사라져도 습관은 남는구나.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도윤이 먼저 말했다. "...왠지 모르게 당신이 낯설지 않네요."


서하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래요?"


"혹시 저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기억은 안 나지만..."


"있어요." 서하가 속삭였다. "많이."


"어디서요?"


"...여러 곳에서요."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처음 보는데 마음이 편해요."


서하가 미소 지었다. "저도요. 오랜만인데 편해요."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지만... 저한테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서하는 망설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좋아요. 하지만 오래 걸릴 거예요."


"시간 있어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처음부터요." 도윤이 말했다. "천천히."


서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당신은... 기억을 편집하는 사람이었어요."


"편집사였군요."


"네. 아주 뛰어난." 서하의 목이 멨다. "그리고... 너무 착한 사람이었어요."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는... 가까웠나요?"


서하가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긴 이야기 같으니까."


"...좋아요."


"뭘 드실래요?"


"아메리카노요."


도윤이 잠깐 멈췄다. "...저도 아메리카노인데."


서하가 웃었다. "그래요. 우린 취향이 비슷했어요."


......................


도윤이 커피를 들고 돌아왔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도윤이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네?"


"당신 이름이... 윤서하라고 했죠?"


"네."


"예쁜 이름이네요."


서하가 미소 지었다. "예전에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나요?"


커피를 건네던 도윤의 손이 서하의 손을 스쳤다.


순간 전율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멈췄다. 도윤이 자신의 손을 봤다. 이상했다. 익숙했다.


"...이상하다."


"뭐가요?" 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 손을 잡아본 것 같은데..."


서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네?"


"아니, 착각인 것 같네요." 도윤이 손을 더듬었다. "하지만 왠지..."


기억은 사라져도 느낌은 남는구나. 서하는 생각했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미 시작된 걸지도.


창밖으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아 있었다.


도윤이 서하를 바라봤다. 서하도 도윤을 바라봤다.


"그럼..." 도윤이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까요?"


서하는 눈물을 닦았다.


"네. 처음부터."


도윤이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한도윤입니다."


서하가 그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윤서하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창밖으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작가의 말》


12화의 여정이 끝났습니다.


도윤과 서하의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남는다는 메시지.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열린 결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셨을 거예요.

두 사람은 다시 사랑하게 될까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두 사람처럼,

우리 모두 언제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마웠습니다. - 수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