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 일주일 후.
햇살이 따스했다.
윤서하는 눈을 떴다. 천장의 형광등이 꺼져 있었다.
대신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을 햇살이 하얀 시트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복도에서 간호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TV 소리도 들렸다.
"서하야, 정신 들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조민혁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다. 며칠 밤을 새운 것 같았다.
"...민혁아?"
서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정신 차렸구나." 민혁이 물컵을 건넸다. "일주일이나 잤어."
서하는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실이었다. 혼자였다.
"...도윤이는?"
민혁의 표정이 굳었다.
"도윤이는 어디 있어?"
"그가..." 민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 있냐고!" 서하가 소리쳤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에 힘이 없었다. 비틀거렸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민혁이 서하를 붙잡았다.
"놔. 도윤이 찾아야 해."
"서하야..." 민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너를 구하고 사라졌어."
서하의 몸이 굳었다.
"아니야."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지? 그가 사라질 리 없어..."
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서하를 안아줄 뿐이었다.
창밖으로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다.
......................
문이 열렸다.
서한비가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지쳐 보였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단정했던 머리도 흐트러져 있었다.
"서하 씨, 깨어났군요."
서하가 한비를 봤다. "도윤이가 어디 있어요?"
한비는 잠시 침묵했다. "모릅니다."
"뭐라고요?"
"도윤은 당신의 감정 과부하를 전부 흡수했어요. 역방향 링크가 완료된 직후, 당신은 안정됐지만..."
"그 사람은요?"
"뇌파는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한비가 창밖을 보았다.
"하지만 깨어난 후 이틀 만에 퇴원했고, 그 뒤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찾아봤어요?"
"집도, 회사도, 자주 가던 곳도 다 돌아봤어요." 한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왜 떠난 거죠?"
한비가 서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죄책감이 가득했다.
"아마... 기억과 감정을 모두 잃었을 거예요."
서하의 입술이 떨렸다.
"너무 많은 감정을 감당하면서 뇌의 방어 메커니즘이 작동한 것 같아요. 모든 것을 초기화해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백지 상태로."
"그럼 절 기억 못 한다는 거예요?" 서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우리가 함께했던 모든 것을?"
"...죄송합니다."
"아니야..." 서하가 머리를 감쌌다. "이럴 순 없어..."
한비의 손이 떨렸다. "제가... 막았어야 했는데. 두 분 다 말렸어야 했는데."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가 선택한 거예요."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낙엽이 소용돌이쳤다.
......................
이틀 후, 서하는 퇴원했다.
집 거실에 앉아 TV를 켰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기억 편집 기업 레미니언스가 대규모 시스템 붕괴 사고로 강제 폐쇄됐습니다.
지난주 발생한 감정 코드 폭주 사건으로 약 3천여 건의 기억 데이터가 손상되었으며, 127명의 의뢰인이 감정 손실 증후군 등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화면에 레미니언스 건물이 비췄다. 출입구에 노란 봉인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시위대들이 피켓을 들고있었다.
"기억을 조작한 범죄 기업!"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라!"
서하는 TV를 껐다.
고요했다.
'도윤이가 희생한 게... 이렇게 끝나다니...'
문이 열렸다. 민혁이 들어왔다.
"서하야, 밥은 먹었어?"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고 있었다.
"레미니언스 뉴스 봤구나." 민혁이 옆에 앉았다.
"민혁아." 서하가 속삭였다. "도윤이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야. 살아있을 거야."
"하지만 날 기억 못 하잖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지 몰라."
민혁이 서하를 안아줬다. "괜찮아. 찾을 수 있어."
서하는 민혁의 품에서 눈물을 흘렸다. 꺼진 TV 화면에 자신의 텅 빈 얼굴이 비쳤다.
......................
[2043년 2월]
서하의 작업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녀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맴돌았다. 눌렀다. 음이 울렸다.
하지만 멜로디가 이어지지 않았다. 손을 떼었다.
노트북 화면에 미완성 가사들이 떠 있었다.
"당신을 기다려요"
"텅 빈 자리에"
"돌아와줘요"
모든 노래가 그 사람 이야기였다.
서하는 핸드폰을 들었다. 연락처를 열었다.
한도윤. 마지막 통화: 3개월 전. 손가락이 전화 버튼 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누를 수 없었다.
그는 받지 않을 것이다. 아니, 기억조차 못 할 것이다.
창밖을 봤다.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어디 있어요?" 서하가 창에 손을 얹었다. "살아는 있는 거죠?"
그녀는 코트를 입었다. 오늘도 거리를 걸어야 했다. 오늘도 그를 찾아야 했다.
"오늘도 찾아봐야지."
문을 열고 나갔다.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서하는 천천히 걸었다. 매번 뒤를 돌아봤다. 혹시 그가 있을까 봐. 비슷한 뒷모습만 봐도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낯선 사람이었다.
자주 가던 카페 앞을 지났다.
그 순간.
서하의 발이 멈췄다.
카페 창가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뒷모습. 검은 셔츠. 짙은 갈색 머리.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설마..."
서하가 천천히 카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손이 떨렸다. 숨이 가빠졌다. 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다음 이야기가 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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