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증명

by 수담

빛이 있었다.


한도윤은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떴다는 표현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사방이 순백의 빛으로 가득했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없었다.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도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도윤 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윤이 돌아섰다. 그곳에 윤서하가 서 있었다. 그녀 역시 빛으로 이루어진 듯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긴머리가 보이지 않는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았다.


"서하 씨... 깨어났어요?"


도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르겠어요. 여기가 어디죠? 전 분명 레미니언스에서..."


"우리의 기억 속이에요." 도윤이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 의식이 공유되고 있는 공간."


서하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빛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게..."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들렸다. 두 개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고 있었다.


도윤이 멈춰 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손... 잡아도 될까요?"


서하는 머뭇였다. 하지만 곧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끝이 닿는 순간, 공간 전체에 파장이 퍼졌다.


빛의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나갔다.


따뜻했다.


"따뜻해요..." 서하가 속삭였다.


"네." 도윤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처음으로... 따뜻해요."


......................


그 순간,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도윤과 서하의 주변으로 수천 개의 빛 입자들이 소용돌이쳤다.


그것들은 천천히 형태를 이루며 영상으로 변해갔다. 마치 오래된 필름을 재생하는 것처럼.


첫 번째 기억이 펼쳐졌다.


레미니언스 상담실. 석양빛이 들어오는 창가. 젊은 도윤이 서류를 보고 있고, 서하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감정을 되살리고 싶어요. 전 너무 오랫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당신 눈은 왜 이렇게 슬퍼 보이죠?"


과거의 서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편집사님이 그런 말을 하다니."


"죄송합니다. 전문적이지 못했네요."


"아니에요." 서하가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좋아요. 누군가 제 감정을 봐준다는 게."


현재의 도윤이 그 장면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서하는 자신의 과거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두 번째 기억.


한강 공원. 석양이 강물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벤치에 앉은 두 사람.


서하가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코에 묻혔다. 도윤이 웃으며 휴지로 닦아주었다.


"편집사님, 지금 웃었어요?"


"...그랬나요?"


"처음 봤어요. 웃는 얼굴."


"당신 때문인가 봐요."


현재의 서하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물이 글썽였다.


세 번째 기억.


레미니언스 옥상.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도윤이 서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서하 씨, 제가... 당신을 좋아합니다."


"...네?"

"편집사로서가 아니라, 한 남자로서요." 도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규정 위반이고, 비윤리적이고, 제 경력을 끝낼 수도 있는 고백이지만... 말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어요."


과거의 서하가 눈물을 흘렸다.


"저도요. 전 당신 때문에 다시 살아났어요."


두 사람이 키스했다. 별빛 아래서.


현재의 도윤이 눈물을 흘렸다. "기억났어요. 전부 다."


네 번째 기억.


서하의 작업실. 피아노 건반 위로 그녀의 손가락이 춤췄다. 도윤이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이 노래, 당신을 위해 쓰고 있어요."


"제목은요?"


"아직 없어요. 끝나면 알려줄게요."


"평생 함께하자."


"네..약속해요."


현재의 서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이 기억들... 제 거예요?"


도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거예요."


......................


빛이 어두워졌다.


다섯 번째 기억.


레미니언스 편집실. 경보음이 울렸다. 서하가 의자에서 경련하며 쓰러졌다.


도윤이 그녀를 붙잡으며 절규했다.


"서하야! 안 돼!"


병원 침대. 창백한 서하. 일주일간 혼수. 도윤이 그녀의 손을 잡고 울었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여섯 번째 기억.


병원 복도. 깨어난 서하가 혼자 서 있었다. 멀리서 도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서하의 독백이 들렸다.


"도윤아, 미안해. 난 네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아."


"넌 나 때문에 편집사 자격을 잃을 수도 있어."


"그리고 난... 다시 위험해질지도 몰라."


"내가 없으면 넌 다시 행복할 수 있어."


현재의 도윤이 그 말을 듣고 몸을 떨었다. 그는 그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일곱 번째 기억.


카페. 창밖으로 비가 내렸다. 서하가 도윤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우린 헤어져야 해요."


도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슨 소리야? 서하야, 우린 괜찮을 거야."


"아니에요. 전 당신에게 짐이에요. 전 기억을 지울 거예요. 당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안 돼... 제발... 날 두고 가지 마..."


서하가 일어섰다. 눈물을 참으며.


"잘 지내요, 도윤 씨."


그녀가 뒤돌아 걸어갔다. 문 앞에서 멈췄다. 돌아보지 않고 속삭였다.


"사랑했어요."


기억이 사라졌다.


현재의 의식 공간. 도윤이 서하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바보야... 넌 내 행복 그 자체였는데."


서하가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전 당신을 지키고 싶었어요."


"난 네가 지켜지길 원했던 게 아니야." 도윤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냥 네 옆에 있고 싶었어."


"이제... 알았어요."


두 사람이 포옹했다. 빛이 그들을 감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 주변 공간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


빛이 사라졌다.


서하의 눈이 떠졌다. 천장의 차가운 형광등이 눈을 찔렀다.


귀에서 규칙적인 신호음이 들렸다. 삐-- 삐--삐--


"서하 씨!"


한비의 목소리였다. 서하는 고개를 돌렸다. 한비가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여기가..." 서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안정됐어요. 뇌파가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서하는 천천히 옆을 보았다. 도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눈을 감고 있었다.


"도윤 씨는요?"


한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위험합니다."


서하가 모니터를 봤다. 두 개의 그래프가 나란히 떠 있었다.


윤서하: 뇌파 정상 / 감정 수치 안정

한도윤: 뇌파 급락 / 생체 신호 약화


경고음이 울렸다. 삐-- 삐-- 삐--


"감정을 너무 많이 가져갔어요." 한비가 말했다.


"본인의 감정과 서하 씨 것까지. 그의 뇌가 감당할 수 없어요."


"안 돼..." 서하가 일어나려 했다.


"움직이면 안 돼요!"


하지만 서하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도윤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이번엔 내가 구할게요."


한비가 눈을 크게 떴다. "뭐 하려고요?"


"당신이 내 고통을 가져갔다면..." 서하가 헤드셋에 손을 뻗었다. "난 그걸 다시 가져올 거예요."


"안 돼요!" 한비가 외쳤다. "역 링크는 더 위험해요!"


서하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에 결의가 담겼다.


"괜찮아요. 전 이미 한 번 죽었던 사람이에요."


서하의 손이 헤드셋을 집어 들었다. 측두부에 착용했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았다.


"당신의 고통을 내가 가져갈게요. 도윤 씨."


그녀의 손이 스위치를 눌렀다.


화면이 깜빡였다.


[역방향 링크 초기화]

[한도윤 → 윤서하]

[감정 재분배 시작]


한비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모니터에 두 개의 그래프가 동시에 요동쳤다. 서하의 뇌파가 급상승했다.


도윤의 수치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제발..." 한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엔... 두 사람 다 무사하길..."


화면이 붉게 물들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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