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편 - 김민우의 성찰

by 수담

화요일 오전 10시. 김민우는 대학교 철학과 사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었다. 25년 만에 처음으로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방금 전 학과장에게서 들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김 선생님, 미안합니다. 학과 사정상 내년부터 강의를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주 3회에서 1회로. 거의 3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이었다. 학령인구 감소, 인문학 기피 현상, 대학 재정 악화. 모두 예상했던 일이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캠퍼스를 나서며 김민우는 가을바람을 느꼈다. 10월 셋째 주, 단풍이 절정에 달한 은행나무 잎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25년 전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의 설렘이 떠올랐다. 그때는 세상 모든 지식을 나누고 싶었는데.


'이제 정말 끝인 건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김민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평생교육원 강의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다. 아내 은숙의 중학교 교사 월급에 의존하게 될 판이었다.


'25년 동안 뭘 한 거지?'


자택 서재에 앉아 목요일 평생교육원 강의 준비를 시작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주제를 정한 것은 한 달 전이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묘하게 의미심장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였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만들어간다는 뜻.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존재인가? 25년 동안 철학 강사로 살아왔지만, 정작 그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책상 위에는 지난 몇 주간 수강생들이 제출한 소감문들이 놓여 있었다. 평상시라면 대충 훑어보고 말았을 텐데, 오늘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박종수 씨의 글... '용기를 배웠습니다. 72세에 아들에게 먼저 전화하는 것도 용기더군요. 아리스토텔레스 말처럼 작은 용기부터 연습하고 있습니다.'"


김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박종수 할아버지가 그런 변화를 겪고 있었구나.


"정수연 씨... '에픽테토스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니 복직 면접을 보는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결과보다는 도전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복직 면접? 정수연 씨가 언제 그런 결정을 했을까. 강의실에서는 알 수 없었던 개인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현우 씨... '카뮈의 시시포스 이야기를 듣고 나서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거부했습니다. 어려워질 거라고 각오했지만, 아들과의 약속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반항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김민우는 놀랐다. 조현우 씨가 그런 일을 겪고 있었나. 차분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내면에는 그런 고민이 있었구나.


소감문들을 읽으며 김민우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전달한 철학 이론들이 이들의 실제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25년 동안 수많은 학생들에게 강의했지만, 이렇게 생생한 변화를 목격한 적은 없었다.


"여보, 왔어?"


아내 은숙이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45세인 그녀는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15년째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응, 왔어."


"표정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김민우는 대학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강의 축소, 경제적 어려움, 앞으로의 불안감까지.


"그럼 어떻게 하려고?"


은숙의 목소리에는 놀람보다는 차분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모르겠어. 다른 대학을 알아봐야 할까? 아니면 아예 다른 일을..."


"25년 동안 해온 일을 그만둔다고?"


"그게 아니라... 그냥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는 거야."


은숙이 김민우 옆에 앉았다.


"여보, 지난 몇 주 동안 평생교육원에서 강의하고 오는 날 표정 봤어?"


"응?"


"정말 밝았어. 25년 만에 처음 보는 표정이었어."


김민우는 그 말에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변해 있었나.


"왜 그런 표정이었을까? 생각해 본 적 있어?"


김민우는 잠시 생각했다. 평생교육원에서의 강의는 분명 달랐다. 대학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뭔가가 있었다.


"학생들이... 달라."


"어떻게?"


"진짜로 배우고 싶어 해. 그리고 배운 걸 자기 삶에 적용하려고 해."


"그럼 그게 답 아닐까?"


은숙의 말에 김민우는 고개를 들었다.


"여보는 강의를 줄여야 하는 걸 위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기회라고 생각해."


"기회?"


"응. 진짜 하고 싶었던 교육을 할 수 있는 기회."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25년 동안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정해진 내용을 전달하는 일에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목요일 오후, 김민우는 평생교육원 강의실에 들어섰다. 이번에는 조금 일찍 와서 수강생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박종수 할아버지는 여전히 맨 앞자리에 앉아 색깔 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전과는 달리 표정이 밝았다. 뭔가 자신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정수연 씨는 오늘 조금 늦게 왔다. 평상시와 달리 정장 차림이었다. 혹시 복직 면접을 다녀온 건가?


조현우 씨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놓은 채 앉아 있었다. 피곤해 보이지만 예전 같은 절망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 결연한 분위기였다.


"오늘은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김민우는 칠판에 이름을 적었다.


"사르트르는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자입니다. 그의 유명한 명제가 있죠.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박종수가 손을 들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좋은 질문이에요. 쉽게 말하면, 우리는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나고, 그다음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정수연이 말했다.


"그럼 타고난 본성 같은 건 없다는 얘기인가요?"


"사르트르는 그렇게 봤어요.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목적이 없다는 거죠. 대신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통해 우리 자신을 만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조현우가 손을 들었다.


"그럼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건가요?"


"맞아요.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다.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라고 했어요.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이순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유가 왜 저주인가요?"


김민우는 그 질문에 깊이 생각했다. 자신도 지금 그 자유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선택이 어렵기 때문이에요. 만약 우리 인생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겠죠. 하지만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면... 그 책임이 무겁잖아요."


강미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자식들 다 키우고 나니까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30년 동안은 엄마 역할이 정해져 있었는데..."


"바로 그런 상황이에요. 사르트르는 그런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는 때라고 했어요."


김민우는 자신의 상황을 떠올렸다. 25년 동안 강사라는 정체성에 기대어 살았는데, 이제 그것이 흔들리니 자유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이런 자유 속에서도 '진정성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어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완전히 책임지는 삶 말이에요."


강의가 끝나고 김민우는 짐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강의는 평소와 달랐다. 수강생들의 질문이 더 깊이 있었고, 자신도 더 진지하게 답변하고 있었다.


"선생님."


뒤돌아보니 정수연이 서 있었다.


"오늘 복직 면접 결과가 나왔어요."


"아, 그래서 정장을 입고 오셨군요. 어떻게 되었어요?"


"합격했어요. 파트타임으로 근무하게 됐습니다."


정수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축하드려요. 용기 있는 선택이었어요."


"선생님 덕분이에요. 에픽테토스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낼 수 있었거든요."


김민우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런 게 진정한 교육의 의미가 아닐까.


평생교육원을 나와 근처 서점에 들렀다. 사르트르 관련 책을 더 찾아보려고 했다. 철학 코너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교수님?"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10년 전 대학에서 가르쳤던 제자였다.


"아, 지훈이구나. 어떻게 지내?"


"안녕하세요. 우연히 뵙네요."


이지훈은 3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당시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이었다.


"지금 뭐 해?"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인문학 서적 편집자로."


"오, 그래? 철학 공부가 도움이 되겠네."


"네, 많이 도움 돼요. 그런데 교수님은 여전히 강의하세요?"


김민우는 잠시 망설였다.


"응... 하고 있어."


"교수님 강의 정말 좋았어요. 특히 소크라테스 이야기."


"소크라테스?"


"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씀하시면서, 진정한 교사는 학생에게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하게 만드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김민우는 그 말을 기억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말이 제 인생을 바꿨어요. 덕분에 지금 일도 찾게 됐고."


"그래?"


"네. 책을 만들면서도 늘 생각해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하고."


지훈과 헤어지며 김민우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10년 전 자신의 강의가 한 학생의 인생에 그런 영향을 미쳤다니.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민우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떠올렸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고 '무지의 지' -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지혜.


25년 동안 자신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사인 자신도 함께 배우는 것이었다.


집에 도착해 은숙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정수연의 합격 소식, 과거 제자와의 만남,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까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평생교육원 강의를 더 늘려보려고 해.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인문학 교육을 해보고 싶어."


"새로운 형태?"


"응.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참가자들이 함께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그런 거."


은숙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이야. 그게 진짜 여보가 하고 싶었던 일 아닐까?"


그날 밤 김민우는 서재에서 새로운 강의 계획을 세웠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처럼,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때였다.


25년 동안 '대학 강사'라는 정해진 틀 속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함께 배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박종수 할아버지가 72세에 새로운 질문을 시작했듯이, 48세의 김민우도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했다.


창밖으로 10월의 밤바람이 불어왔다. 단풍잎들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계절을 위한 준비였다. 김민우도 이제 자신만의 새로운 계절을 준비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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