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 위기와 결속

by 수담

11월 첫째 주 월요일 오전. 박종수는 종합병원 대기실에서 건강검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11월, 두꺼운 패딩을 입고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3년 전 은퇴 후 처음 받는 종합검진이었다.


"박종수 님, 진료실로 오세요."


의사는 50대 중반의 차분한 사람이었다. 책상 위에는 박종수의 검사 결과지들이 여러 장 놓여 있었다.


"혈압이 좀 높으시네요. 그리고 여기, 폐 엑스레이에서 작은 음영이 보입니다."


"음영이요?"


박종수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직 확정적인 건 아니지만, 추가 검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CT 촬영하고, 조직검사도..."


의사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45년 동안 기계 부품 만드는 일을 하면서 먼지를 많이 마셨다. 혹시 그것 때문일까.


"큰 문제가 있는 건가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조기에 발견한 거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병원을 나서며 박종수는 아들에게 전화해야 할지 고민했다. 지난달부터 연락이 잦아졌지만, 이런 소식을 전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같은 시각, 성림출판사 편집부. 정수연은 책상 앞에서 원고를 읽고 있었지만 글자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복직한 지 2주가 지났지만 적응이 쉽지 않았다.


"정수연 씨, 이 원고 검토 언제까지 가능해요?"


팀장의 목소리에 정수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 네... 내일까지요?"


"좀 빠듯하네요. 오늘 중에 1차 검토만이라도 부탁드려요."


3년의 공백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예전 같지 않은 집중력, 낯선 시스템, 그리고 무엇보다 집에서의 갈등.


어젯밤 재혁과 또 다퉜다. 지우가 열이 났는데 정수연이 회사에 있어서 재혁이 조퇴를 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할 거야? 아이가 아파도 엄마가 없고."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다고? 그럼 애초에 왜 일을 시작했어?"


재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결혼 7년 만에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점심시간, 정수연은 회사 근처 카페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샌드위치를 씹으며 생각했다. 정말 이게 맞는 걸까. 가정도, 일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은데.


한편 조현우는 회사에서 가장 구석진 자리로 자리를 옮긴 지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달 부당한 업무를 거부한 이후, 회사 분위기는 냉랭했다.


"조 과장님은 이제 단순 업무만 하세요."


인사팀장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15년 경력의 과장이 신입사원 수준의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점심시간에도 함께 먹을 동료가 없었다. 김대리조차 눈치를 보며 거리를 두고 있었다. 혼자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조현우는 생각했다.


'카뮈가 말한 시시포스가 이런 기분일까.'


그날 오후, 이순영은 성호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한 달째 조심스럽게 만나고 있었는데, 어제 성호에게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순영 씨, 할 말이 있어요."


성호의 표정이 어두웠다.


"제 전 부인이... 딸과의 면접을 제한하겠다고 하네요."


"왜요?"


"제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아직 이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이순영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우리 관계를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딸을 못 보게 될까 봐 걱정돼서."


"그럼... 헤어지자는 건가요?"


"아니에요. 잠깐만...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만."


이순영은 가슴이 아팠다. 이제 막 새로운 관계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데, 또다시 혼자가 되는 건가.




목요일 오후 2시. 평생교육원 3층 강의실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김민우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걸 직감했다.


박종수는 평상시보다 말이 없었고, 정수연은 계속 시계를 확인했다. 조현우는 피곤해 보였고, 이순영은 아예 뒷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늘은 마르틴 하이데거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김민우는 칠판에 이름을 적었다.


"하이데거는 '공동존재(Mitsein)'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평상시라면 누군가 질문을 했을 텐데, 오늘은 조용했다.


"하이데거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다'라고. 즉, 혼자서는 완전할 수 없다는 거죠."


박종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혼자 사는 것은 불완전한 건가요?"


"불완전하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정수연이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때문에 힘들 때도 있잖아요."


"물론이죠. 하이데거도 그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진정한 공동존재'와 '일상적 공동존재'를 구분했습니다."


김민우는 칠판에 두 개념을 적었다.


"일상적 공동존재는 그냥 남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고, 진정한 공동존재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관계를 말해요."


강의가 끝나고도 사람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김민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오늘 힘든 일이 있으셨나요? 표정들이 어두워서."


박종수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병원에서... 추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네요."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폐에 음영이 있다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정수연이 의자를 돌려 박종수를 바라봤다.


"어머, 언제 검사받으세요?"


"다음 주 화요일에 CT 촬영이요."


"혼자 가세요?"


"네... 아들한테는 아직 말 안 했어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정수연이 갑자기 말했다.


"제가 같이 가드릴까요?"


"뭐라고요?"


"혼자 가시면 불안하실 텐데. 저도 화요일에는... 회사 일이 좀 여유로워서."


박종수는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럴 필요 없어요.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정말 함께 가고 싶어요."


조현우도 말했다.


"저도... 요즘 회사에서 어려움이 있어서 혼자 있으면 우울해져요."


이순영이 고개를 들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만나던 사람과... 잠시 거리를 두게 됐거든요."


김민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이데거의 말을 떠올렸다. 진정한 공동존재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럼... 우리 한번 모여볼까요? 강의실이 아닌 곳에서."


정수연이 제안했다.


"어디서요?"


조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제 집에서 어떨까요? 아내가 좋은 사람이라 반갑게 맞아줄 거예요."




토요일 오후 3시. 조현우네 아파트 거실에는 평생교육원 수강생들이 모여 있었다. 혜진이 정성스럽게 차와 과자를 준비해 줬고, 준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어른들을 바라봤다.


"준호야. 여기 계시는 분들이 아빠 수업 친구분들이야.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저는 아빠 아들 준호에요."


가족의 환대에 모두들 조금씩 마음이 열렸다.


박종수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무서워요. 혼자 늙어가는 것도, 아프게 되는 것도."


"당연하죠. 저도 그래요."


정수연이 말했다.


"저는... 복직했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네요. 집에서도 남편이 계속 불만이고, 아이는 아픈데 제가 없고."


"남편분이 왜 반대하세요?"


이순영이 물었다.


"아이한테 엄마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도 제 인생이 있잖아요."


조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해요. 회사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는데, 왕따가 됐어요."


"왕따요?"


"부당한 업무를 거부했거든요. 그 이후로 동료들이 다 저를 피해요."


혜진이 남편의 어깨를 토닥였다.


"여보는 잘한 일이야."


"그래도 현실적으로는 어려워졌어요. 승진은 틀렸고, 심지어 해고될 수도 있고."


이순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제 막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상대방 전 부인 때문에 또 어려워졌어요."


"어떻게 된 건가요?"


"그분이 딸하고 면접하는 걸 제한하겠다고 하네요. 저 때문에."


박종수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 모두 힘든 시기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준호가 블록을 가지고 와서 할아버지에게 보여줬다.


"할아버지, 이거 로봇이에요. 제가 만들었어요."


"우와, 멋있네. 준호가 정말 잘 만들었구나."


박종수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정수연이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 있으니까 조금 마음이 편해지네요."


"저도요."


조현우가 동의했다.


"혼자 있을 때는 계속 나쁜 생각만 들었는데."


김민우가 말했다.


"하이데거가 말한 공동존재가 바로 이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것."


강미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혼자 있으면 자꾸 우울해지는데, 여러분과 있으니까 든든해요."


혜진이 더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저희 집에 언제든 놀러 오세요. 특히 박종수 어르신, 검사받고 나서 결과 궁금해 미칠 것 같으면 여기 와서 같이 기다려요."


"정말... 괜찮을까요?"


"물론이에요. 우리 준호도 할아버지 보면 좋아하고."


정수연이 제안했다.


"그리고 화요일 병원 검사, 제가 정말 같이 가겠어요. 혼자 가시면 안 되겠어요."


"저도 시간 되면 같이 갈게요."


이순영도 손을 들었다.


조현우가 말했다.


"그럼 우리... 단톡방이라도 만들까요? 힘들 때 서로 연락할 수 있게."


"좋은 생각이에요."


김민우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이름은 뭘로 할까요?"


박종수가 웃으며 말했다.


"'목요일 친구들' 어때요?"


"좋아요!"


모두들 동의했다.




그날 저녁,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여전히 각자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박종수는 집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수야, 아빠야."


"네, 아빠. 무슨 일이세요?"


"할 말이 있어서... 병원에서 추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네."


"뭐라고요? 어디가 아프세요?"


"폐에 음영이 있다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아빠, 제가 같이 갈게요."


"아니다. 네가 직장 다니는데 무슨..."


"아빠 혼자 가시면 안 돼요. 제가 휴가 내고 가면 되요."


박종수는 아들의 목소리에서 진심 어린 걱정을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일 혼자 끙끙 앓지 마세요. 저도 아빠 아들이잖아요."


전화를 끊고 박종수는 '목요일 친구들' 단톡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여러분 덕분에 아들한테 말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곧바로 답장들이 올라왔다.


정수연: "다행이에요! 아들분도 걱정하실 거예요."

조현우: "가족이 함께하는 게 제일 좋죠."

이순영: "할아버지 힘내세요. 우리가 응원해요."

김민우: "화요일 검사 잘 받으시고 꼭 연락 주세요."


박종수는 핸드폰을 보며 웃었다. 72세에 이런 친구들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11월의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하이데거가 말한 공동존재를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혼자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들도 함께라면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목요일 친구들'이라는 이름처럼, 이들의 우정은 매주 목요일 오후에서 시작되어 이제 일상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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