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by 수담

1년 후, 2025년 12월


"할아버지, 또 책 읽어요?"


손자 민준이 박종수의 서재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니체 전집』이 펼쳐져 있었다.


"응, 재미있어서."


"할아버지가 공부하는 거 신기해요. 우리 아빠도 할아버지 자랑 많이 해요."


박종수는 웃었다. 11살이 된 민준은 이제 할아버지와 철학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자랐다.


"민준아, 오늘 목요일 친구들 모임 가는데 같이 갈래?"


"네! 조현우 아저씨네 갈 거예요?"


"응. 이번에는 김민우 선생님네야."


지난 1년 동안 목요일 친구들은 매월 정기 모임을 가졌다. 각자의 집을 돌아가며, 때로는 카페에서, 때로는 등산을 하면서.


같은 시각, 정수연은 성림출판사에서 마지막 업무를 정리하고 있었다. 파트타임 근무 1년 차, 이제는 일과 육아의 균형을 어느 정도 찾았다.


"정수연 씨,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동료가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복직이지만 이제는 자연스러워졌다.


집에 도착하니 지우가 숙제를 하고 있었다. 8살이 된 지우는 이제 엄마가 일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엄마, 오늘 할아버지들 만나러 가죠?"


"응. 저녁 먹고 갈 거야."


재혁과의 관계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처음에는 갈등이 많았지만,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려 노력한 결과였다.


조현우는 여전히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승진은 물 건너갔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다. 대신 준호와 보내는 시간이 늘었고, 가족과의 관계가 더 깊어졌다.


"아빠, 오늘 목요일 모임이죠?"


열세 살이 된 준호가 물었다.


"응. 너도 같이 갈 거지?"


"네! 박종수 할아버지 책 이야기 듣는 거 재미있어요."


이순영은 성호와 함께 카페에 앉아 있었다. 1년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관계가 되었다. 재혼은 아직 이른 이야기지만,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오늘 모임에 나도 같이 가도 될까?"


성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이지. 다들 보고 싶어 했어."


김민우는 새로운 형태의 인문학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학 강의는 더 줄어들었지만, 평생교육원과 여러 기관에서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삶과 함께하는 철학'이라는 새로운 커리큘럼이었다.


"여보, 준비됐어?"


은숙이 목도리를 두르며 물었다.


"응. 오늘은 그냥 자유롭게 이야기 나눠보려고 해. 더 이상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1년 전보다 훨씬 즐거워 보여."


"정말 그래. 이제야 내가 하고 싶었던 교육이 뭔지 알 것 같아."


저녁 7시, 김민우네 거실에는 목요일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1년 전과 똑같은 사람들이지만, 모두 조금씩 변해 있었다.


박종수는 민준의 손을 잡고 왔다. 아들 민수도 가끔 모임에 참석했다. 3대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정수연은 지우와 함께 왔다. 재혁도 이제는 아내의 모임을 이해하고 지지했다.


조현우는 가족 모두와 함께 왔다. 혜진과 준호도 이제는 목요일 친구들의 일원이나 다름없었다.


이순영은 성호와 함께 왔다. 새로운 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강미숙은 남편 정호와 함께 참석했다. 빈 둥지 증후군은 거의 극복했고, 이제는 자신만의 시간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김지훈은 직장 동료와 함께 왔다. 철학에 관심이 있다는 동기였다.


"1년이 지났네요."


김민우가 말했다.


"정말 빨랐어요."


정수연이 대답했다.


"그런데... 1년 전과 비교해서 어떠세요?"


박종수가 먼저 말했다.


"확실히 달라졌어요. 뭔가... 더 용기 있어진 것 같아요."


"저는 일과 가정의 균형을 어느 정도 찾은 것 같아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수연이 이어서 말했다.


조현우가 말했다.


"저는...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알게 됐어요. 회사 일도 중요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더 소중하다는 걸."


이순영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다시 사랑할 용기를 얻었어요. 성호 씨 덕분에."


성호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김민우가 말했다.


"제가 제일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진정한 교육이 뭔지, 철학이 어떻게 삶과 연결되는지."


"그럼... 우리 내년에도 계속 만날까요?"


김지훈이 물었다.


"당연하죠!"


모두들 동의했다.


"그런데... 이제는 새로운 사람들도 초대해 볼까요?"


박종수가 제안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우리가 받은 걸 다른 사람들과도 나눠야죠."


밤이 깊어가며 모임은 끝났지만, 사람들은 쉽게 헤어지지 않았다. 1년 전 강의실에서 만난 인연이 이제는 진짜 가족 같은 관계가 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박종수는 민준의 손을 잡고 걸었다.


"할아버지, 내년에도 목요일 친구들 만날 거죠?"


"그럼, 계속 만날 거야."


"좋아요. 저도 클 때까지 같이 갈 수 있어요?"


"물론이지."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떠 있었다. 2025년의 마지막 달, 목요일 밤이었다.


72세에 시작한 첫 질문은 이제 끝나지 않는 질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찾아가는 것이었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처럼, 같은 목요일 오후가 계속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반복이 두렵지 않았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고, 계속 성장하고 배워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목요일 오후, 삶을 묻는 시간은 계속될 것이다.





《작가의 말》


여기까지 함께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박종수 할아버지가 72세에 평생교육원 강의실 문을 열었을 때, 저 역시 설렘과 두려움을 함께 느꼈습니다.

과연 이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요.


이 이야기를 쓰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동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나이도, 환경도, 고민도 다르지만,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모두 같은 학생이라는 것을요.


박종수 할아버지처럼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어보고,

정수연처럼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으며,

조현우처럼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고,

이순영처럼 다시 사랑할 용기를 내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 속에 있다는 것을 함께 발견하셨기를 바랍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 가장 빠른 순간입니다. 당신의 '첫 질문'은 언제든 시작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목요일 친구들'을 만나시길, 그리고 함께 성장하며 삶을 묻는 시간을 가지시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이 책이 당신의 목요일 오후에 작은 위안이 되었기를 바라며.


2025년 가을비가 정겨운 어느 날... 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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