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 - 새로운 출발

by 수담

2024년 12월 마지막 주 목요일 오후 1시 50분.


김민우는 평생교육원 3층 계단을 오르며 가방 속 강의 자료를 만졌다. 3개월 반 전 첫 수업 때와 똑같은 동작이었지만, 마음은 전혀 달랐다.


강의실 문을 열자 벌써 모든 사람이 와 있었다. 9월 첫날과 같은 자리에 앉았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박종수는 여전히 맨 앞자리에 앉아 색깔 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긴장한 모습이 아니라 여유로워 보였다. 지난주 정밀검사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암이 아니라 단순한 폐렴 흔적이었다. 아들 민수와 손자 민준이 함께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에 왔을 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정수연은 창가 세 번째 줄에 앉아 있었다. 뽀로로 물병은 여전히 가방 옆에 있었지만, 예전처럼 시계를 자주 보지는 않았다. 재혁과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타협점을 찾았다. 주 3일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지우가 아플 때는 재혁이 번갈아 돌보기로 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서로 양보한 결과였다.


조현우는 네 번째 줄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여전히 느슨했지만 표정이 밝았다. 회사에서의 처지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이제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매주 토요일 준호와 보내는 시간, 목요일 친구들과의 모임이 진짜 중요한 일이었다.


이순영은 맨 뒤가 아닌 가운데쯤에 앉아 있었다. 성호와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성급하지 않게,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면서.


강미숙은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녀들이 독립한 후의 공허함은 여전했지만, 이제 그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다음 학기에는 서예 수업도 들어볼 생각이었다.


김지훈은 노트북 대신 손으로 메모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취업은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김민우의 인사에 박종수는 이번에도 벌떡 일어나서 인사했다. 하지만 이제는 경직된 90도 인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목례였다.


"지난 3개월 반... 어떠셨어요?"


김민우는 칠판에 아무것도 적지 않고 물었다.


박종수가 먼저 말했다.


"많이 배웠습니다. 책에서만 보던 철학이 실제 삶과 이렇게 연결될 줄 몰랐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요?"


"용기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용기. 아들에게 먼저 전화하는 것도, 병원 검사 결과를 가족과 함께 듣는 것도 모두 용기더라고요."


정수연이 이어서 말했다.


"저는 에픽테토스의 말이 가장 도움 됐어요.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니까, 남편 설득은 못 해도 제 선택은 할 수 있더라고요."


"지금은 어떠세요?"


"완벽하지는 않아요. 여전히 힘들고, 가끔 지우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균형을 찾아가고 있어요."


조현우가 말했다.


"카뮈의 시시포스가 저한테는 제일 와닿았어요. 바위가 계속 굴러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는 것. 회사 일은 여전히 어렵지만, 이제 그게 제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이순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니체의 영원회귀... 처음에는 무서웠어요. 똑같은 인생을 반복한다는 게. 하지만 이제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민우는 이들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25년 동안 해온 강의 중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저도 많이 배웠어요. 여러분 덕분에."


"선생님이요?"


정수연이 놀란 듯 물었다.


"네. 철학이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걸 보면서."


김민우는 칠판에 '소크라테스'라고 적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어요. '너 자신을 알라'라고. 그리고 진정한 교사는 학생에게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하게 만드는 거라고 했죠."


"질문하게 만드는 거요?"


박종수가 물었다.


"네. 여러분이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 것. 제가 여러분에게서 배운 게 바로 그거예요."


강의를 마치고 나서 사람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김지훈이 말했다.


"이제 정말 끝인가요?"


"수업은 끝이지만... 우리 관계는 계속되겠죠."


조현우가 제안했다.


"정식으로 '목요일 친구들' 모임을 만들어볼까요?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좋은 생각이에요."


박종수가 동의했다.


"첫 모임은 언제 할까요?"


정수연이 물었다.


"새해 첫 목요일 어떠세요? 1월 2일."


모두들 동의했다. 강의실을 나서며 박종수가 뒤돌아봤다. 3개월 반 전 처음 이 문을 열었을 때의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창밖으로는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2024년의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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