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고백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다. 녹색 불빛이 들어오는 순간, 나는 습관처럼 발을 내디뎠다. 수요일 오후, 퇴근길은 언제나 그렇듯 평온했다. 이십 년째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살아온 세월이 그만큼 되었다는 뜻이다.
그때였다.
왼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었다. 몸이 허공에 떴다가 아스팔트에 내동댕이쳐졌다. 통증보다 먼저 온 건 이상한 기억이었다.
서윤.
25년 만에 처음 떠오른 이름이었다.
왜 하필 지금, 그녀가 생각났을까.
..........
"괜찮으세요? 정신 차리세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눈을 뜨니 낯선 얼굴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의식은 있습니다. 다리를 못 움직이시나요?"
"움직여집니다."
나는 천천히 다리를 움직였다. 팔도, 손가락도.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서윤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맴돌았다.
병원 응급실은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다. CT 촬영을 하고, X-레이를 찍고, 의사의 문진을 받았다. 경미한 뇌진탕. 하루 입원 관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보, 괜찮아요?"
혜진이 도착한 건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아내는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이었다. 놀란 기색도, 안도의 눈물도 없었다. 이십 년을 함께 산 부부는 그런 것이었다. 감정의 진폭이 둔탁해지는 것.
"응. 별일 아니야."
"보험 처리는 어떻게 하죠?"
실용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은 간호사에게 다가가 차분하게 보험 서류에 대해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서윤을 떠올렸다. 서윤이라면 어땠을까. 달려와 내 손을 꼭 잡고, 목놓아 울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건 스물두 살의 서윤이다. 지금의 서윤은... 아니, 그녀에게는 지금이 없다.
"입원실로 올라가요. 저는 집에 가서 옷 좀 챙겨 올게요."
혜진은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손을 잡지 않았다.
..........
병실은 4인실이었다. 다행히 다른 환자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우니, 천장의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깜박이는 불빛을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나는 25년 전, 그 겨울로 돌아갔다.
..........
1995년 12월. 밤 11시.
전화벨이 울렸다. 자취방 책상 위에 쌓인 교육학 노트를 덮고 수화기를 들었다.
겨울방학. 교생 실습을 앞두고 나는 늦은 밤까지 공부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민우야..."
서윤의 목소리였다. 술에 취한 목소리. 흐느끼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서윤아, 무슨 일이야?"
"지금... 어디야? 나 힘들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서윤을 좋아했다.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교양 수업을 듣다가 알게 된 사이였다. 그녀는 늘 밝고 명랑했지만, 그 뒤에 숨은 외로움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갈게. 자취방에 있어?"
"응..."
전화가 끊겼다. 나는 두꺼운 파카를 걸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캠퍼스는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파고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발자국 소리만이 고요한 밤을 깼다. 서윤의 자취방까지는 걸어서 십 분 거리였지만, 뛰니 오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서윤은 빨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민우야..."
"들어가자."
방 안에는 소주병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오징어도 있었다. 연탄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나는 서윤을 소파에 앉히고, 물을 떠다 주었다.
"무슨 일이야?"
"재혁 오빠... 결혼한대."
재혁 선배. 서윤이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경영학과 4학년. 외모도 좋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서윤은 일 년 넘게 그를 짝사랑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그래..."
"다른 여자랑. 내가... 내가 뭐가 부족한 걸까."
서윤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말로는 위로할 수 없었다. 사랑의 아픔은 시간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새벽까지 곁에 있었다. 서윤은 조금씩 진정했다. 울음이 그쳤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민우야, 너는 왜 이렇게 착해?"
"친구니까."
그 말을 하면서, 나는 속으로 다른 말을 삼켰다.
'사랑하니까.'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서윤에게 나는 그저 편한 친구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서윤이 소파에서 잠들었다. 나는 담요를 덮어주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얀 세상 속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날 밤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우리는... 아니, 정확히 언제부터였지? 왜 기억이 흐릿할까.
..........
병실에서 눈을 떴다. 창밖은 어두웠다. 혜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상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서윤과 손을 잡았던 것 같은 기억.
"사랑해"라고 말했던 것 같은 기억.
하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꿈이었을까. 아니면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을까.
"아니야. 우리는 연인이 아니었어."
나는 중얼거렸다. 확신했다. 서윤과 나는 친구였다. 짝사랑하는 친구. 그 이상은 아니었다.
..........
혜진이 병실에 들어온 건 밤 아홉 시였다. 옷가방을 들고 있었다.
"많이 아파요?"
"괜찮아."
"다행이네요."
짧은 대화였다. 혜진은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다시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아."
"꿈이요?"
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핸들을 꽉 쥔 것처럼,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꿈이면... 다행이네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나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혜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튿날 아침, 퇴원했다. 혜진이 운전을 했다. 차 안은 조용했다. 라디오도 틀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서재로 향했다. 오래된 앨범이 책장 한 구석에 꽂혀 있었다. 먼지를 털고 꺼냈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대학 시절 사진들이 나왔다. MT 사진. 축제 사진. 학과 친구들과 찍은 단체 사진.
그리고.
1996년 4월. 벚꽃이 만발한 캠퍼스.
서윤과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 활짝 웃고 있었다.
사진을 뒤집었다.
서윤의 필체였다.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쓴 글씨.
'민우야, 사랑해. 1996.4.15'
손이 떨렸다.
나는 그녀와 사귄 적이 없다. 분명히 없다.
그런데 이 사진은 뭐란 말인가.
[다음 화에 계속]
*이 작품은 OO의 'OOOOOO'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픽션입니다.
『선율의 서재 』각 에피소드는 3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기 연재는 어려울 것 같아, 게릴라 형식인 매거진으로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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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10.23.(목), 22:00
3화 - 10.24.(금),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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