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율의 서재 Ep.01(2/3)

미완의 고백

by 수담
미완의고백.jpg 미완의 고백 2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서재 바닥에는 사진들이 흩어져 있었다.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서윤과 나. 웃고 있는 우리. 손을 잡은 우리. 키스하는 우리.


"이게... 정말 나인가?"


아침 일찍 혜진은 출근했다.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푹 쉬세요"라고 말하고 나갔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진실을 알아야 한다.


..........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더 많은 증거가 있을 것이다. 내 기억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 아니, 내 기억은 이미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25년 동안.


사진첩을 한 권 더 꺼냈다.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 두 사람 모두 머리띠를 하고 있다.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 바닷가 사진. 파도를 배경으로 서 있는 우리. 카페 사진.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잔의 커피.


그리고 강릉 사진.


1996년 7월. 경포대 해변. 우리는 커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흰색 티셔츠에 빨간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첫 여행 기념. 영원히 잊지 말자. - 서윤"


"나는 서윤과 여행을 간 적이 없어. 없다고..."


하지만 사진이 증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갔다. 함께 웃었다. 함께 사랑했다.


..........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다이어리 한 권이 나왔다.


1996년.


표지는 낡았고, 모서리는 헤졌다. 손이 떨렸다. 천천히 펼쳤다.


내 글씨였다. 스물다섯 살의 내가 쓴 글씨.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다.


2월 14일.

"캠퍼스 뒷산 벤치에서 고백했다. 목소리가 떨려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서윤아, 나... 너를...'

그 순간 서윤이 내 손을 잡았다. '나도 알아. 나도 그래.' 눈이 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었다."


3월 2일.

"서윤이 내 자취방에 처음 왔다. 라면을 끓여줬는데 너무 짜다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평생 듣고 싶다."


4월 15일.

"벚꽃이 만개했다. '백년 함께 하자'고 서윤이 말했다. 나는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다."


5월 3일.

"강변을 걷다가 처음으로 '사랑해'라고 말했다. 서윤이 눈물을 글썽이며 '나도 사랑해. 정말 많이'라고 했다."


7월 20일.

"강릉에 왔다. 경포대 해변을 걸었다. 서윤이 소리친다. '민우야, 나 정말 행복해!' 나도 소리친다. '나도!'"


8월 10일.

"서윤이 취직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둘 다 꿈 이루면, 그때 결혼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8월 15일 이후의 페이지들은 찢겨져 있었다. 난폭하게. 마치 누군가 그 기억을 지우려고 한 것처럼.


..........


다이어리를 읽으며 기억이 되살아났다.


파편처럼. 조각조각.


도서관에서 나와 손잡고 걷는다. 서윤의 손은 따뜻하다. "민우야, 오늘 저녁 뭐 먹을래?" 서윤이 묻는다.

"너 먹고 싶은 거."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카페에서 핫초코를 마신다. 서윤의 코끝에 크림이 묻었다. "여기." 내가 손가락으로 닦아준다. 서윤이 웃는다. 그 웃음이 온 세상을 밝힌다.


강변을 걷는다. 석양이 지고 있다. "사랑해." 내가 말한다. 서윤이 멈춰 선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나도 사랑해. 정말 많이."


강릉 바다. 일출을 본다. 서윤이 내 팔을 끼고 있다. "우리 나중에 결혼하면 여기 자주 오자."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들이 쏟아진다.


행복했다.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왜... 왜 나는 이 모든 걸 기억하지 못했을까?"


...........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태준. 대학 동기. 유일하게 연락이 닿는 친구.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갔다.


"여보세요?"


"태준아, 나 민우야."


"어, 무슨 일이야?"


"너 서윤이 기억나?"


긴 침묵이 흘렀다.


"... 왜 갑자기?"


"나 서윤이랑 사귄 거 맞아?"


"...너, 진짜 모르는 거야?"


"그래. 사진도 봤고 일기도 봤는데 기억이 안 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거... 너가 일부러 잊은 거야."


"무슨 소리야?"


"너, 병원 간 적 있잖아. 정신과. 트라우마가 심하다고..."


"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민우야..."


"말해. 무슨 일이었어?"


"...서윤이가..."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우야, 나중에 전화할게."


태준이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


혜진이 서재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닥에 흩어진 사진들을 보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걸 왜 꺼냈어요?"


"당신, 알고 있었어?"


"뭘요?"


"서윤이. 나랑 서윤이 사귄 거."


혜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 앉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네."


"왜 말 안 했어?"


"당신이... 기억 못 하니까요."


"당신...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아무것도. 마치 남의 이야기 같아."


혜진이 눈물을 글썽였다.


"서윤 언니가..."


"언니?"


세상이 멈췄다.


"당신이 서윤이를 알아?"


"저... 서윤 언니 과 후배였어요."


혜진이 소파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저는 3학년 때 언니를 만났어요. 언니가 자랑하셨죠. 정말 좋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그게... 당신이었어요."


"그런데 왜 나랑 결혼을..."


"당신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요. 혼자서는 못 살 것 같아서요. 그래서 곁에 있어주고 싶었어요. 언니 대신."


가슴이 무너졌다.


"서윤이는... 어디 있어?"


혜진이 눈물을 글썽였다.


"당신 정말 기억 안 나요?"


"말해줘. 제발."


혜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윤 언니는... 1996년 9월 5일에..."


숨을 멈췄다.


"교통사고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돌아가셨어요."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진을 가슴에 안았다. 스물다섯 해 만에 처음으로 울었다.


"내가... 죽인 거야?"


"아니에요. 당신 잘못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


내가 일부러 잊어버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음 화에 계속]




*이 작품은 OO의 'OOOOOO'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픽션입니다.


『선율의 서재 』각 에피소드는 3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재가 아닌 작품이 완성되면 바로 게시하는 매거진으로 발행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3화 - 10.24.(금),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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