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율의 서재 Ep.01(3/3)

미완의 고백

by 수담

다음 날 아침.


나는 소파에서 밤을 보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서윤의 얼굴이 보였다. 스물두 살의 서윤. 웃고 있는 서윤. 내 손을 잡은 서윤.


그리고 이제는 볼 수 없는 서윤.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들어왔다. 부엌에서 소리가 났다. 혜진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야기 들을 준비 됐어요?"


혜진이 식탁에 커피 두 잔을 놓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혜진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저는 1996년 3월에 서윤 언니를 처음 만났어요. 같은 과 선배였죠. 언니는 정말 밝은 분이었어요."


혜진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떨리고 있었다.


"그 봄에 언니가 저한테 말했죠. '혜진아, 나 남자친구 생겼어.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게 당신이었어요."


나는 커피잔을 꽉 쥐었다.


"언니는 자주 당신 이야기를 했어요. 얼마나 착한지, 얼마나 자상한지. 저도 몇 번 당신을 봤어요. 동아리

모임에서요. 당신은... 정말 언니를 사랑하는 게 눈에 보였어요."


혜진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해 여름이 지나고, 9월이 왔어요. 9월 5일이었어요. 목요일."


9월 5일.


"언니가 제게 전화를 했어요. '혜진아, 오늘 민우가 군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 내일 입대거든.' 언니 목소리가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혜진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날 저녁, 언니는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요. 캠퍼스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무시한 차가..."


세상이 멈췄다.


"언니는 그 자리에서..."


..........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혜진이 내 손을 잡았다.


"당신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에요. 언니가 늦어서 걱정하던 중에 연락이 온 거예요. 병원으로 오라고. 당신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는 고개를 숙였다.


"장례식 때 당신을 처음 제대로 봤어요. 당신은... 말이 없었어요. 울지도 않았어요. 그냥 멍하니 서 있기만 했어요."


혜진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입대를 연기하고 병원에 입원했죠. 정신과.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기억을 억압할 수 있다고. 방어기제라고. 너무 아픈 기억은 뇌가 스스로 지워버린다고."


그랬구나.


"당신은 석 달 만에 퇴원했어요. 그런데... 서윤 언니를 기억하지 못했어요. 아니, 기억하긴 하는데 '친구'로만 기억했어요. '짝사랑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람'으로. 6개월간의 행복했던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의사 선생님은 그대로 두는 게 낫다고 했어요. 기억이 돌아오면 다시 무너질 수 있다고."


..........


혜진이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이 군대에서 돌아온 건 1999년이었어요. 저는 그때 4학년이었고요. 우연히 학교 앞에서 마주쳤어요."


혜진이 작게 웃었다. 슬픈 미소였다.


"당신은 저를 기억 못 했지만, 저는 당신을 기억했어요. 당신이 저한테 말을 걸었어요. '혹시 같은 과예요?'"


"그날부터... 저는 당신 옆에 있기로 마음먹었어요."


"사랑해서요? 글쎄요. 처음엔 언니에 대한 미안함이었을지도 몰라요. 언니 대신 당신을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


혜진이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2000년에 우리는 결혼했어요. 당신은 저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저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게 진심이었어요. 저는 정말로 당신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혜진이 조용히 울었다.


"당신은 한 번도 제 손을 먼저 잡지 않았어요.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당신이 저를 보는 눈빛에는... 언제나 뭔가 빠진 것 같았어요. 저는 알았어요.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언니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그래도 괜찮았어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


나는 혜진을 바라보았다.


20년을 함께 산 여자. 하지만 제대로 본 적이 없던 여자.


"혜진아..."


처음이었다. 20년 결혼생활에서 처음으로 아내의 이름을 부른 것이.


"나는... 당신한테 정말 못된 사람이었어."


"아니에요."


"20년 동안 당신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괜찮았어요. 정말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혜진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이제... 서윤한테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고 올게. 그리고 돌아와서...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혜진이 눈물을 흘렸다.


"...네."


..........


며칠 후.


가을 햇살이 따뜻했다. 묘지는 조용했다. 낙엽이 바람에 흩날렸다.


故 한서윤 (1974-1996)


묘비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벚꽃 아래에서 찍은 그 사진. 1996년 4월 15일.


"서윤아... 나야. 민우."


바람이 불어왔다.


"25년 만에 왔어. 늦어서 미안해. 아니, 사실 나는 한 번도 온 적이 없구나. 기억을 못 해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혜진이가 다 얘기해 줬어.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미안해. 나는 다 잊고 살았어. 너를 '짝사랑했던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사진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우리.


"하지만 이제 알았어. 우리는 정말 사랑했었다는 거. 6개월이었지만, 그 6개월은 진짜였어."


목이 메었다.


"이거 봐. 우리 정말 행복해 보이지? 1996년 4월 15일. 너는 내게 '백 년 함께 하자'고 했어. 우리는 백 년을 함께하지 못했어. 고작 6개월."


"하지만... 그 6개월이 내 인생을 만들었어. 내가 기억하지 못해도, 내 무의식 어딘가에 너는 살아있었어.

그래서 나는 혜진이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나 봐. 너를 놓지 못해서."


눈물이 떨어졌다.


"서윤아... 서윤아..."


"이제 보내줄게. 아니, 보내는 게 아니라... 제대로 간직할게."


"너는 내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아니었어. 너는 내 '이루었던 사랑'이었어. 짧았지만 완전했던 사랑. 그걸 이제야 알았어."


사진을 묘비 앞에 놓았다.


"고마워, 서윤아. 나를 사랑해 줘서. 그리고 미안해. 너를 잊고 살아서. 하지만 이제는 기억할게. 제대로."

일어섰다.


"안녕."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왔다.


..........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길.


라디오에서 옛날 노래가 흘러나왔다. 1995년의 노래. 그때 자주 듣던 노래.


가질 수 없는 너 - 뱅크


'술에 취한 니 목소리...문득 생각났다던 그 말...

...........(중략)...........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지 못하잖아..."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사랑이 뭔지. 이별이 뭔지.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는 알아."


"가질 수 없는 사랑도 있고, 가졌다가 잃는 사랑도 있고, 곁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랑도 있어."


"나는 세 가지 다 경험했어."


"이제는... 제대로 볼 시간이야."


...........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자 저녁 준비하는 냄새가 났다. 혜진이 부엌에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뒤에서 안았다.


혜진이 놀라 돌아보았다.


"... 다녀왔어요?"


"응."


"괜찮아요?"


"응. 이제 괜찮아."


혜진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보는 얼굴.


"혜진아, 나... 당신한테 제대로 고백한 적 없는 것 같아."


"... 네?"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혜진이 눈물을 글썽였다.


"20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말한 적 없지? 이제부터 자주 말할게. 사랑해."


"... 나도 사랑해요."


두 사람이 안았다. 창밖으로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갔다.


..........


그날 밤, 나는 서재를 정리했다.


사진들을 앨범에 차곡차곡 넣었다. 다이어리도 제자리에 꽂았다. 더 이상 숨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꺼내보지도 않을 것이다.


서윤은 이제 추억이다.


아름다운, 소중한, 완결된 추억.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혜진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혜진이 놀랐지만, 이내 미소 지었다.


화면에서는 오래된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1990년대 드라마.


"이거 우리 대학 때 봤던 거 아니에요?"


"그러네. 기억나?"


"네. 기억나요."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그렇게 가을밤은 깊어갔다.


..........


미완의 고백.


나는 평생 두 번의 고백을 했다.


하나는 1996년, 서윤에게. 그건 완성되었지만, 너무 짧았다.


하나는 2025년, 혜진에게. 25년이 걸렸지만, 이제 시작이다.


늦었지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걸 이제야 깨달은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여러 형태로 온다.


불꽃처럼 타올랐다 사라지는 사랑도 있고, 잔잔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사랑도 있다.


나는 두 가지를 모두 받았다.


이제는 알 것 같다.


가질 수 없는 사랑은 없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가질 뿐이다.


기억으로, 그리움으로, 그리고...


지금 이 순간으로.




《작가의 말》


"미완의 고백"


사랑은 때로 완성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완성되지 못한 것도 누군가의 삶을 완성합니다.


민우의 두 사랑은 모두 진짜였습니다. 서윤과의 사랑은 짧았지만 완전했고, 혜진과의 사랑은 길지만 이

제야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미완'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루지 못한 꿈, 놓쳐버린 기회, 끝내지 못한 이야기들. 하지만 그

미완들이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당신의 미완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그것이 비록 완성되지 못했어도, 당신을 완성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보세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


*이 작품은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픽션입니다.


1995년. 노래가 흐르던 시절을 기억하는 모든 분들께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더불어 『선율의 서재』다음 에피소드도 기대해 주세요.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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