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믿음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게 있다.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로 무언인가를 간절히 원하면 이룰 수 있다는 긍정의 의미를 지닌 이론이다.
한때 난 피그말리온의 사랑이 자신이 조각한 여인을 사람으로 만든 것처럼 나 역시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나를 도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해 줄 거란 막연한 기대를 한 적이 있었다. 광활한 우주 안에서 티끌만큼의 존재감도 없는 내가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는 것은 티끌 만큼의 가능성도 없는 일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난 믿음이 간절하면 나를 보호해 주는 가시 울타리가 쳐진다느니, 우주의 기운을 끌어당기는 힘이 생긴다느니 하는 따위의 감상적 기적은 믿지 않았으니 말이다.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겉으로만 소망했으니 그 일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거기다 그 간절함이 근거조차 없는 황당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오늘의 이야기는 헛웃음 나는 황당함이 묻은 이야기다.
아이의 옹알이 하나에도 내 아이는 천재가 아닌가 하는 어리석은 착각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대한민국 상위 몇 % 하는 사람들이 던진 이론에 걸려 이리저리 휘둘렸다. 그 밑밥을 물고 있는 한 그들의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벌려 밑밥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아이를 위한 사랑이라고 미련을 떨면서 말이다.
'민사고 천재들은 하버드가 꿈이 아니다'란 책을 읽고는 내 아이가 민사고를 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용 문제를 걱정하면서.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말을 할 수 있다면 "쓸데없는 생각 말고 그 시간에 아이랑 놀아주기나 해" 라며 충고라도 했을 것이다. "아이를 위한답시고 육아서 읽으며 스트레스 받지 말고 네 마음을 다스리는 책이나 읽어"라는 말과 함께. 그때의 나는 내 아이의 평범함은 보지 못한 채 자꾸 말하기도 부끄러운 착각에 빠져 엉뚱한 세계에서 헤매고 있었으니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민사고를 갈까 봐 걱정했던 것보다 더 황당했던 건 아인슈타인처럼 똑똑한 사람이 되라고 아이에게 아인슈타인 우유를 먹인 일일 거다. 그 행위는 아무런 근거도 없고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게 뻔한 행동이었음에도 피그말리온의 기적을 바라기라도 한 듯 그런 일을 했다. 아인슈타인 우유를 먹는다고 아인슈타인처럼 천재가 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 아닌가) 마트에서 우유를 집어 들 때마다 외던 주문도 통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으니) 그건 단지 아이에 대한 기대가 낳은 해프닝이었다.
후에 아이는 우유를 물처럼 마시다 살만 찌게 되었다며 투덜거렸다. 몸이 튼튼해졌으니 우유를 마신 효과는 보지 않았냐 하겠지만 그마저도 쑥쑥이 아닌 통통이라 문제였던 거다.
객관적이지 못한 시선
가끔 내가 벌인 행동에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나 자신은 합리적이고 올바른 판단을 하며 산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서 만큼은 객관적이지 못했다. 지나친 기대가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꾸 우스운 사람이 됐다.
하지만 그런 기대도 가능성이 보장된 나이거나, 아이가 사정권 안에 있을 때라야 가능했던 일이다. 이제는 내 손을 떠났다. 내 손을 떠나 뒤에서 바라보니 올바른 모습이 보였다. 나의 시선이 객관화된 것이다.
바로 보이니 착각과 허황된 꿈에 빠져 살았던 과거의 나에게 한 마디 던져주고 싶어졌다.
"그 때 너, 제정신이었어?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