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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un 26. 2020

게으름이 가져다준 매실의 향

매실의 향을 기다리며.

매실의 향을 기다리다.


일을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일이 싫은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고 했던가? 말대로라면 난 일이 싫은 사람이다.


며칠 전부터 남편은 매실을 따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난 그 말을 듣고 일을 미루는 핑곗거리를 찾았다. 그 핑곗거리는 전에 브런치에서 읽은 매실 관련 글이었다. 그 글에선 초록의 탱글탱글한 청매실은 상품 가치 면에선 뛰어나지만 황매실이나 홍매실에 비해 향이 덜 하다고 했다. 향이 좋으려면 시간을 두고 익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나는 속으로 '옳다구나!' 탄성을 질렀다. 당분간은 매실 따는 일에서 벗어나 편한 마음으로 일을 미룰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을 미룬다고 그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찾아온다. 시간을 잠시 밀어낸 것이지 없앤 건 아니었기에 멀어진 시간이 다가오면서 일도 함께 찾아왔다.

햇빛을 보지 못한 아래쪽은 익지 않은 매실이 더 많다.

'그래, 난 일이 싫은 게 아니었어. 그건 오로지 향을 품은 매실을 기다렸을 뿐이야'

그렇게 스스로의 게으름을 변명하며 미뤄둔 일을 시작했다.


매실청이나 매실장아찌를 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매실을 따서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매실을 따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매실나무엔 가시가 있다. 쭉쭉 뻗은 새순은 예외지만 매실이 열리는 오래된 가지에는 장미 가시의 뾰족함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살을 할퀴는 가시가 있다. 그래서 매실을 딸 때는 그 가시를 피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매실 따는 일에 수고로움만 있냐?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매끄러운 피부결을 자랑하는 맑간 매실을 똑똑 따는 기쁨은 수확의 기쁨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의 기쁨은 결과가 말해준다. 잘 씻은 매실에선 달콤한 살구향이 난다. 이게 본래의 매실 향인지, 매실 향과 살구향이 비슷해 구분이 어려운 것인지 알 순 없지만 시간이 가져다준 매실 향은 매실이 과일임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다. 그 향을 견디지 못한 나는 결국 노랗게 익은 매실 하나를 베어 물었다.


"아이고야** 너 매실 맞구나"


얼굴이 찡그려지면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향은 달콤했으나 맛은 배신의 맛이다. 겉모습과 향으로 자신을 감추려 했지만 본질은 숨길 수가 없었다. 매실의 본질은 맛에 있었다. 매실에서 단맛이 느껴졌다면 매실은 이미 매실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을 것이다. 매실은 그렇게 신맛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향을 품은 매실은 청으로만 담기로 했다. 소금에 절여 그 향을 빼앗기고 싶진 않아서다. 나무 하나에서 땄을 뿐인데 알이 굵고 튼실해 중간 정도의 항아리 하나를 가득 채웠다. 동량의 설탕이 필요하니 15kg짜리 설탕 한 포대를 사서 넣어야 했다. 이 정도면 뭐 설탕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발효되면 좋은 성분도 얻을 수 있고, 매일 먹는 것도 아니니 괜찮을 거란 믿음으로 또 그렇게 올해의 매실청을 담았다.


익어서 더 향기롭다.


잘 익어 향이 고스란히 배인 매실로 청을 담으며 생각했다. 분명 잘 익은 매실은 크기도 굵고 향도 깊다. 그런데 왜 청매실의 상품 가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유통 과정에서의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익은 매실은 크기도 좋고 향도 깊지만 운반되는 과정에서 상할 위험성이 크다. 그러니 좋은 크기와 달콤한 향을 가졌음에도 덜 익은 매실의 단단함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리라.


문득 사람의 삶도 매실과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삶의 경험과 경륜으로 향기로워졌지만 젊음의 단단함에는 미치지 못하는 어른들처럼.


게으름으로 시간을 기다린 덕에 올해의 매실청은 향을 고스란히 입게 되었다. 3개월 후면 항아리에서는 향긋한 매실향이 번질 것이다. 그러면 나의 입안에서도 매실의 새콤달콤한 향이 번지겠지?

따고 보니 익은 정도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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