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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ul 16. 2020

포도봉지 주렁주렁, 전문가님 웃지 마오.

포도에게 사랑을 베푼 날.

포도에게 사랑을 베푼 날


주말은 충전의 시간이다. 한 주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주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물리적인 휴식의 시간. 그래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리모컨을 친구로 삼고 있는 남자들(여자도 있으려나?) 이해할 수가 있다. 비록 그들의 행동이 주말마다 반복되어 지켜보는 아내 복장을 터지게 만들지라도 어찌 되었건 주말은 그렇게 휴식을 위해 할애되어야 할 시간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주말이 더 바쁜 사람이 되었다. 평일에 여유를 갖고 하지 못한 일을 주말에 몰아서 하다 보니 주말이 휴식이 아닌 직장 생활의 연장선이 되어 월화수목금금금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물론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은 심적으로는 편하다. 그러나 육체적인 피로는 직장 생활을 능가하고 있으니 주말이 기다려지면서도 두려운 시간이 된 것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전엔 나의 주말이 이렇게까진 바쁘지 않았는데 왜 이리 바빠진 것일까를 생각해 봤다.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그 바탕에 남편의 취미 생활이 있다는  발견했다.

 

남편이 취미 생활을 하기 전에는 집안일을 많이 도왔다. 본인이 해야 할 일뿐만 아니라 나의 일까지 도왔다는 말이다. 가령 식사 준비를 할 때도 늘 함께 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이제는 나 혼자 오롯이 해내야 하니 일의 강도가 크게 느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말에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열거하면.. 일주일 동안 먹을 기본 반찬이며, 평일엔 하지 못한 이불 빨래, 그동안 모아둔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수거하여 내놓는 일 등이 그것이. 거기에 첨가되는 일이라면 내가 직접 하지는 않지만 남편 옆에서 남편을 도와 해야 하는 일들이다. 예를 들어 저번 주말에 난 남편이 마당의 잔디 깎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말에는 포도 봉지 씌우는 일을 도왔으며, 이번 주말에는 비를 맞고 쑥쑥 자란 나무들을 이발시키는 걸 지켜봐야 할 것이다. 굳이 만들려 한 것이 아닌데도 일은 빈 시간을 남기지 않고 우리를 잘도 찾아온다.


저번 주말에 포도에 포도봉지 씌우는 일만 해도 그렇다. 포도나무 2그루에 열린 포도에 포도봉지를 씌우는 일은 전문가라면 뚝딱 해치울 손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마저도 몇 시간에 걸쳐해야 했다. 그게 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다.


본래 포도의 새순이 열리기 시작하면 그중 몇 개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따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조롱조롱 열린 포도순 하나하나가 귀하고 신기해 그것을 따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다. 그랬더니 졸망졸망 포도송이가 많이도 열렸다. 포도가 이렇게 많이 열리면 송이는 굵어지지 않고 볼품이 없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볼품없는 포도라도 열린 것에 감사하며 따뜻한 눈길로 키워냈다. 그랬더니 하나의 나무에 서너 봉지 달려야 할 포도 봉지가 주렁주렁 달리고 말았다. 포도 농사를 지은 분이 봤더라면 웃을 일이요, 농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포도가 많이도 열렸다며 손뼉 치며 좋아라 할 일이다.


포도가 많이 열리니 포도봉지도 많이 씌워야 했다. 주렁주렁 열린 포도봉지 속에는 어린 순을 잘라내지 못한 따뜻한 마음이 들어있다. 농사를 모르는 농사꾼의 헛풍년도 들어있다. 봉지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은 흐뭇하다. 제대로 농사라도 지어낸 기분이다.


충전의 시간에 에너지를 소비했다. 이번 말에도 에너지를 소비할 것이다. 몸이 힘드니 아플 만도 한데 그렇지는 않다. 몸을 쓰면 에너지가 소비되지만 정신적으로는 에너지가 충전되어 제로섬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스스로 밸런스가 맞춰진 것이다. 일이 에너지를 빼앗아가도 정신이 뿌듯해지면서 에너지가 충전되었다. 그러니 이번 주말에도 일을 하며 에너지를 충전해야 하나 보다.


포도봉지 주렁주렁 전문가님 웃지마오

덕지덕지 붙은 봉지 키운이의 사랑이니

우습다 놀릴지언정 풍년이라 답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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