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빛구슬 Aug 10. 2020

대한민국 공무원은 국가비상사태 현장에 있다.

휴가를 반납하다.

반납한 휴가


계획대로라면 오늘부터 남편은 휴가다. 나와 시간을 맞춰 휴가 날짜를 정했고 그 기간 동안 해야 할 일을 의논했다. 그런데 남편의 휴가는 자동 반납되었고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평상시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근무해야 했다. 장마와 태풍으로 인해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나라의 세금을 받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겠냐고 말하겠지만 공무원도 한 집안에서는 가장이거나 일원이고 그들에게도 나름의 계획이 있어 그 계획에 맞춰 일정을 잡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남편이 휴가 날짜를 이번 주로 잡은 것도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다시 날을 잡아야 하지만 상대방에게도 계획이 있을 것이니 그마저도 불확실하다.


코로나가 심각했을 때도 토요일, 일요일은 없었다. 일요일에는 교회의 집단 감염을 막기 위해 아침이면 교회로 출근을 했다. 자가 격리자도 관리해야 해서 물품을 전달하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 온도를 체크했다. 코로나가 잠시 주춤하니 지루한 장마 끝 홍수 피해로 다시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했다.


오늘은 딸이 집에 오는 날이다. 2월에 서울로 올라간 이후 처음이다. 우리의 휴가에 맞춰 내려오는 것이다. 서울에서 코로나가 심각할 때는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집에 있으란 이유로, 우리 지역에 코로나가 심각했을 때는 혹시라도 내려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내려오지 못하게 하면서 딸은 발이 묶여 꼼짝하지 못하다가 독립 후 처음으로 집을 찾은 것이다. 더운 여름이지만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줄 요량이었다. 물론 계획이 어긋났으니 그 계획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휴가 때 시급하게 하려고 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집을 수리하는 일이었다.


이규보는 이옥설이란 글에서 어물어물하다 미처 수리하지 못한 행랑채를 언급하며 비가 샌 지 오래된 행랑채를 빨리 수리하지 않아 서깔래, 추녀, 기둥, 들보가 모두 썩어 못 쓰게 되면서 그 행랑채를 수리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반면 한 번밖에 비를 맞지 않은 행랑채는 재목을 완전하게 다시 쓸 수 있어 비용이 들지 않았다고도 했다. 무슨 일이든 허물을 발견했으면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는 걸 얘기하려 한 것이다. 우리의 몸이나 정치도 이런 이치라고 하면서.


그런데 지금 우리 집에 이규보의 행랑채와 같은 일이 생겼다. 툇마루가 흰개미의 공격으로 골다공증을 앓게 된 것이다. 구멍이 숭숭 난 다리가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옆의 기둥으로까지 번져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남편은 이 일을 이번 휴가 때 하려고 한 것이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한옥을 수리하시는 분이 방역을 하고 나무를 구하는 일까지 해야 하니 시간이 걸린다고 하여 휴가도 넉넉히 잡았다. 흰개미는 임시방편으로 개미 잡는 약을 뿌려 없애 놓긴 했다. 행여 어물어물 미루다 이규보의 행랑채 꼴이 될까 두렵다.


이번 장마로 피해를 입은 수재민에 비하면 우리 집 일은 명함도 못 내밀 일일 것이다. 이런 글이 그들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라의 비상사태 때면 집안일은 뒷전이고 현장의 일이 먼저인 공무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쓰고 싶었다.


남편이 출근하는데 하늘이 맑았다. 장마가 소강상태인 거 같았다. 남편에게 비가 그쳤으니 휴가를 낼 수 있지 않냐고 물으니 남편이 정색을 하며 말한다. 지금은 국가 비상사태라고. 우리 지역이 재난 지역인 거 모르냐고. 피해도 피해지만 앞으로의 복구 작업이 더 심각하다고.


나는 세상을 너무 편하게 생각했다. 비가 그쳤으니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복구 작업이 남았고, 보상 문제도 남았다. 국가 재난이 있을 때마다 민감해지는 남편으로 세상을 더 배우고 있다.


대한민국 공무원은 국가 비상사태 땐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걸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한 남편을 보며 느끼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족한 나도 쓴다. 브런치 1년의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