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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Oct 07. 2019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 치매

치매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선

나에겐 특별한 친구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 특별하기도 하고, 나의 힘든 시기를 함께 해 준

친구여서 더 특별하기도 합니다.

그 친구와는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명절이나 한 해를 마감하는 시간에는 늘 문자라도 주고받았기에 우리의 인연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물론 그 인연도 친구 덕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항상 먼저 연락을 하고 안부를 물어준 이가 그 친구였으니까요.)


나와 친구의 인연이 초등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40년을 넘게 알고 지낸 사이가 되겠네요.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릴 때,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은 '공부 잘하는 모범생 반장' 이것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집에서 막내였던 친구는 맏이니 나보다 더 어른스러웠으며, 초등학교 시절 동네 친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한 저를 위로해 준 속 넓은 애어른이었습니다.


그런 친구를 결혼하고는 거의 만나지 못하고 sns를 통해서만 소식을 접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작년 명절, 항상 안부 인사를 먼저 해 주던 친구가 문자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친구가 나의 무심함에 화가 난 것은 아닐까? 설마 나와의 인연을 끊으려는 건 아니겠지?

친구는 미혼입니다. 미혼인 친구가 결혼한 친구들이 쏟아내는 남편과 자식에 대한 이야기가 불편해서 거리를 두려고 한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성격을 봤을 때 사람의 인연을 그리 쉽게 끊을 친구는 아녔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먼저 안부 인사를 했고, 친구는 답을 했기에 별일 없이 그 일은 해프닝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의 sns에서 친구를 위로하는 직장 동료로 보이는 사람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본 순간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바로 문자를 해서 시간이 나면 만나자고 했습니다. 친구는 시간을 조율해 보겠다고 했고, 한참이 지난 후에 약속 시간을 알려왔습니다.


친구를 만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동안 친구에게 있었던 일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제 삶 속에서 허우적대느라 다른 사람의 고통은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나 자신이 가장 힘들게 살고 있으니 내 앞에서 힘들다는 명함 따위는 내밀지 마'라는 말로 주위 사람들의 고통은 나의 것보다 작을 거라 여겼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나는 너희와는 달라. 너희가 아무리 힘들다 해도 시집살이하는 나보다는 나아.'라는 말로 그들에게도 있을지 모르는 고통을 무시해 버렸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통이 아무리 심한 들 나보다는 못할 거란 지레짐작만 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고통이란 것은 사람을 가려 가며 찾아오는 건 아닌가 봅니다.

좋은 부모 밑에서 인정받으며 살다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는 친구에게 내가 느끼는 고통 따위는 없을 줄 알았는데 아녔습니다. 

물론 작은 시련 정도야 있을 수 있겠지만 고통이라 불릴 만큼의 아픔은 아니겠지 했지요.

그런데 친구에게도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너무 아파 차마 입 밖으로 내보일 수 조차 없는 아픔이.


친구는 엄마가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습니다. 직장을 휴직하고 1년을 간병했지만 병이 악화되어 결국은 요양병원까지 갔다고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몰랐다면 친구를 위로하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며 다독여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믿을 수 없으니 위로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왜? 왜 몰랐어? 네가 왜 몰라?

나의 질문에 친구도 이렇게 갑자기 악화될 줄 몰랐다며 울먹였습니다.

처음에는 제대로 정리도 못하시면서 부엌일을 고집하는 행동이 나이 들어 생긴 아집으로만 여겼답니다. 그런데 말이 안 통할 정도로 심해진 고집에 병원을 찾았는데 치매라는 진단이 나왔다네요.


지금은 친구를 알아보지도 못하신답니다. 자신을 아줌마라 부르는 엄마를 보는 친구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 옛날 깔끔하고 단정하셨던 엄마가 먹을 것을 욕심내는 할머니로 변해있는 모습을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나 있을까요?


몇 달 전 '눈이 부시게'란 프로를 가슴 아프게 보았는데, 치매가 가족들에게 주는 고통은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친구를 통해 치매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병인지 실감합니다.

자기 자신을 잃고 새로운 세상에서 헤매고 있으실 그분으로 인해. 그리고 주말이면 자신의 생활도 없이 엄마를 병문안 가야 하는 친구로 인해.


친구에게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언니, 오빠와 그 책임을 나눠 짊어지라고요.

그런데 혼자 몸인 친구가 해야 할 일이 더 많은가 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큰 것이라 여기고 다른 사람은 나보다는 낫다는 말로 자신의 고통을 확대 과장시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런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고통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친구를 보고 온 뒤 전에 읽었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나는 주인공이 미혼이기에 엄마를 찾는 일에 그리 적극적일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면 절대 하나의 일에 그리 매달릴 수는 없다면서요. 그런데 미혼인 친구가 혼자 짐을 떠안으려는 걸 보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엄마를 부탁해' 속 주인공이나 친구는 자신의 몸이 혼자여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엄마이기에 그리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겪어보지 않은 인생에 이리저리 나의 잣대를 대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병. 그동안의 내 모습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드는 병.

치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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