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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Apr 30. 2021

단독주택의 정원 손질은 책임감이 따른다

소유한다는 건 책임을 진다는 것.

소유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


'마당 전체를 잔디로 깔아버리는 건 어떨까?' 정원을 바라보며 되지도 않을 공상에 빠졌다. 피곤함이 몰려와서다. 난 생각 회로가 멈춰버린 로봇이 되어 초점 잃은 눈을 하고는 이제 막 손질을 마친 나무들을 응시했다. 만져 놓으니 보기는 좋으나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손질된 은목서
잘려나간 은목서의 가지들. 새싹이 자란 연한 잎들이다.


우리 집에서 털보 아저씨로 불리는 바위. 머리와 수염이 엉망이다.
이발하고 수염도 깎았다.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나의 어이없음에 헛웃음이 난다. 일한 사람은 내가 아니고 남편인데 힘들다고 지쳐버린 건 나다. 옆에서 입만 놀렸던 내가 먼저 주저앉았다. 나의 입놀림은 수다가 아니고 노동이었던 게 분명하다. 어디에서나 메인보다는 보조가 힘든 법.


 바닥에 나뒹구는 나뭇가지들을 보니 새싹이 돋았다며 좋아라 박수를 쳤던 때가 떠올랐다. 그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 먼 옛날의 기억처럼 아득한 건 그것의 불필요성 때문이리라.


 은목서에 하나 둘 싹이 돋을 때 거친 잎 사이에서 고개를 내미는 앙증맞은 잎들이 대견하여 흐뭇한 눈으로 쓰다듬었다. 어서어서 자라라고 마음속으로 빌기까지 했다. 이런 나의 기도가 그들에게 닿았는지 잎들은 잘 자랐다. 쑥쑥 자랐다. 끝도 모르고 자랐다. 하늘이라도 뚫을 기세였다. 그대로 두었다간 지붕보다 높아져서 우리 집을 거만하게 내려다볼 형국이었다. 가지를 잘라줘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해야 할 일은 하나 더 는다. 나는 게으름의 이름으로 일을 미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조삼모사의 어리석은 원숭이가 된 것이다. 나는 나를 속였다. 그런데 내가 나를 속이는 동안 남편의 눈이 그것을 봐 버렸다. 남편은 "잎이 더 무성해지기 전에 손 좀 봐야겠네"하더니 바로 일에 착수했다. 생각과 동시에 행동을 일으킨 것이다.


 남편에게 집안일은 책임이었다. 집을 소유함과 동시에 그 책임이 시작되었다.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남편은 아버님으로부터 집을 물려받았고, 아파트의 편안함은 몸이 기억하기 전에 머리에서 지웠다. 자신의 선택이었기에 집안일은 늘 1순위가 되었다.


 그 1순위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일들이 그것이다. 지금과 같은 봄날에는 나무들이 무성해지기 전에 정원을 손질해야 한다. 정원을 편하게 손질하려면 전문가에게 맡기면 되는데 이 방법에는 비용이라는 맹점이 도사리고 있다. 남편의 노동은 대가를 바라지 않지만 전문가의 노동은 대가를 바란다. 그러니 지불 능력이 넘쳐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몸을 움직여 정원을 손질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우리 집에는 부유하지는 않으나 부지런한 사람이 있어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임무를 행하고 있다. 나와 같이 부유하지 않으면서 부지런하지도 않은 사람은 단독주택에서 정원을 가꾸는 일 따위는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집을 가꾸는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게 에너지를 모으는 길이며 스트레스를 줄이는 길이다. 단독 주택에서 살아남는 생존 법칙이다.


 부유하지는 않으나 부지런한 남편 덕에 봄날의 정원 가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소유의 삶을 살고자 했던 법정 스님은 난초 화분 하나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속박과 책임감에 힘들었다고 했다. 스님에게 소유는 행복이 아니라 구속이었던 거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집은 어떤 의미로 존재할까? 아마도 그건... 행복한 구속 정도가 아닐까 싶다.

   

밥에 찍은 모습은 평화롭다.
블라인드 뒤 흐릿한 의자는 우리 집 카페 의자다.
대문 입구에 놓인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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