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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Aug 14. 2021

사파이어를 가진 성냥팔이 소녀

브런치X저작권위원회. <성냥팔이소녀>.

왕자의 선물

"할머니, 저도 데려가 주세요. 이곳은 너무 추워요."

"불쌍한 것! 너를 데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단다. 그곳엔 아직 네가 누려야 할 행복이 남아 있어."

"그럴 리 없어요. 이곳에 제가 누릴 행복 따위는 없어요. 그러니 제발 저를 데려가 주세요"


성냥팔이 소녀는 할머니를 향해 두 손을 뻗으며 간절히 애원했어요. 소녀의 애원은 철심장도 녹일 만큼 뜨거웠지요. 하지만 소녀의 서러운 바람할머니를 잡아주진 못했답니다. 할머니는 깃털처럼 가벼운 몸을 하고 하늘로 날아갔으니까요.


"안 돼요 할머니. 가지 마세요. 저만 두고 혼자 가시면 안 돼요"


싸늘하게 식은 소녀의 두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손이 쉴 새 없이 허공을 내저었지만 할머니를 잡을 수는 없었어요. 이제 그 어디에서도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외마디 외침과 함께 소녀가 눈을 떴습니다. 꿈이었습니다. 조금 전 바람을 피해 찾아든 골목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주위에는 온통 재로 변한 성냥개비 투성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사라지면서 성냥불의 따스함마저 가져갔는지 구석진 자리엔 찬 바람이 윙윙거렸고, 꽁꽁 언 발은 빨갛다 못해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언 발을 녹이기 위해 두 다리를 모아 치마로 덮어보았습니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솜 한 줌 들어있지 않은 치마로는 성냥 한 개비의 따스함도 전할 수 없었어요.


문득 꿈속에서 만났던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할머니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넓게 펼친 두 팔은 소녀를 행복의 나라로 이끌 것처럼 포근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소녀를 두고 떠났습니다. 자신을 사랑했던 할머니라면 그럴 수 없는데 왜 혼자 떠나버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 왜 저를 버리셨어요?' 할머니를 부르는 소녀의 마음속에서 눈물이 일렁였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손에는 1 페니의 돈도 들려있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갔다가는 돈을 벌어오지 못했다며 아버지에게 맞을 게 뻔합니다. 운이 좋아 성냥을 하나라도 판다면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아빠가 잠들 때까지 깜깜한 밤거리를 헤매야만 합니다.


소녀는 구석에서 빠져나와 거리에 쌓인 하얀 눈과 마주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가녀린 몸을 흔들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눈빛만큼은 영롱하게 빛나 소녀의 마음을 밝혀주었습니다. 소녀가 감각이 사라진 발로 눈을 밟으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무엇인가 '툭'하며 떨어졌습니다. 하얀 눈을 푸른 바다로 물들이는 새파란 사파이어였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제비 한 마리가 소녀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제비야, 이게 뭐니? 지금 이것을 나에게 주는 거니?"

"네, 아가씨. 그 사파이어는 아가씨를 위한 선물이에요."

"선물? 나는 너에게 선물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이토록 아름다운 보석을 주는 거지?"

"이 선물은 제가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저기 광장 한가운데를 보세요. 황금으로 빛나는 왕자님이 보이시죠. 이 선물은 바로 그분이 주신 거랍니다. 왕자님은 높은 곳에서 언제나 이곳을 내려다보고 계셨어요.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며 눈물지으셨죠. 오늘은 아가씨가 신발까지 잃어버린 것을 보시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빼 저에게 준 거랍니다. 아가씨를 도와드리라고요."

"오, 이런. 그럴 수 없어. 나처럼 보잘것없는 아이 때문에 왕자님이 눈을 잃으실 순 없어. 제비야, 미안하지만 이 보석을 다시 왕자님에게 가져다주겠니. 나는 이 보석을 받을 수가 없구나."

"안 돼요. 저는 왕자님의 마음을 배신할 수 없어요. 이 사파이어는 왕자님의 마음인 걸요. 만약 사파이어를 다시 가져간다면 왕자님은 슬퍼하실 거예요. 그러니 어서 왕자님의 마음을 받아주세요"



소녀는 고개를 들어 광장을 올려다봤습니다. 황금빛으로 눈부신 왕자님의 동상이 보였습니다. 성냥을 팔기 위해 거리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지만 성냥을 팔 생각에 왕자님의 동상에는 눈길 한 번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왕자님은 그런 소녀를 늘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녔습니다. 세상에는 자식을 챙기지 않는 아빠나 성냥을 사주지 않는 사람만 살았던 게 아닙니다. 왕자님처럼 마음 따뜻한 사람도 살았어요. 자신은 평생 사랑받지 못하며 살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따스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소녀의 마음속에서 뜨거운 불꽃이 일었습니다. 불꽃은 조금 전 흘렀던 눈물은 자취도 없이 말려버렸습니다.


소녀는 왕자님의 보석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습니다. 왕자님이 보석 속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행복한 모습을 하고선 말입니다.


'왕자님, 고맙습니다. 왕자님께서 주신 마음을 제 마음속에 늘 간직할게요.'

소녀는 왕자님의 마음을 호주머니 속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습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제비야, 고마워. 바람이 차니 조심해서 날아가."


제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소녀는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하고 맞은편에 있는 매튜 아저씨네 빵집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빵집 문을 열자 문에 달린 풍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그 소리에 배가 불룩한 매튜 아저씨가 고개를 돌려 소녀를 쳐다봤습니다. 소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앞치마에 담긴 성냥을 가게 벽면에 붙은 식탁 위에 쏟았습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이 성냥을 모두 사 주세요. 이 성냥을 사 주시면 제가 매일 아침 아저씨네 빵집으로 출근해서 청소와 잔심부름을 해드릴게요. 성냥 값으론 오늘 저녁에 먹을 빵 두 조각이면 충분해요. 제가 너무 어려서 걱정이 되시겠지만 맡은 일만은 잘 해낼 수 있답니다. 그러니 제발 저의 부탁을 거절하지 마시고 알았다는 한 마디만 해 주세요."


소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다급하게 말들을 뱉어냈습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리둥절해진 아저씨는 멍한 표정으로 소녀를 쳐다보다 바구니에서 빵 두 조각을 집어 봉지에 담은 후 소녀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래, 그러려무나. 가게 문은 아침 8시에 여니 너는 그보다 1시간은 먼저 와야 할 게야"

"감사합니다.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께서 오늘 하신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열심히 일할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매튜 아저씨를 향해 연거푸 인사를 한 소녀는 빵 봉지를 들고 뒷걸음질 치 듯 가게를 빠져나왔습니다.


가게를 나왔을 때 소녀의 얼굴은 불꽃을 삼킨 것처럼 화끈거렸습니다. 심장은 진격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방망이질 쳤고요. '내가 지금 빵집에서 무슨 일을 한 거지' 소녀는 자신이 한 일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토록 뻔뻔한 용기는 어디에서 생겨난 걸까요? 어찌 되었거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용기 덕에 소녀는 방금 자신의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내일부터는 차가운 거리를 헤매며 성냥을 팔지 않아도 됩니다. 춥다고 성냥을 피울 필요도 없습니다. 매튜 아저씨네 빵집은 거리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따뜻할 테니까요. 


빵 봉지를 품에 안고 집으로 가는 소녀의 발걸음은 새들의 날갯짓보다 가벼웠어요. 발이 시리다는 것도 잊었습니다. 아빠가 기뻐하실지 모르지만 소식은 빨리 전하고 싶었습니다. 소녀의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찼습니다. 발걸음에는 어떤 두려움도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왕자님의 보석을 행운의 부적으로 간직하기로 결정했어요. 언젠가 보석을 사용할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매튜 아저씨의 빵집 일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집 앞에 도착하여 문을 열려다 할머니가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곳엔 아직 네가 누려야 할 행복이 남아 있어.'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할머니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할머니, 감사합니다. 할머니께선 오늘 일어날 일을 알고 계셨던 거죠. 잠깐이지만 저를 데려가지 않는 것을 원망했어요. 죄송합니다. 이제부터는 행복한 아이로 살아갈 테니 저를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할머니는 이곳에서의 행복이 모두 끝나면 만나러 갈게요. 그때 우리 웃으면서 만나요."


마음속 기도를 마친 소녀는 흐릿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자신의 집 낡은 문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습니다.





<창작 의도>


어린 시절 안데르센 동화를 읽으면 자랐습니다. 안데르센 동화는 다른 동화에서 볼 수 없는 흥미진진함과 다양한 결말로 어린아이(나)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한 주인공이 행복한 결말을 맞는 기존의 동화와는 다른 결을 지닌 작품들이었다고나 할까요. 그 시절에는 그것이 서글픔과 안타까움으로만 읽혔습니다.


그러다 어른이 되어 그의 작품 속에 안데르센 자신의 일생이 녹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과 따돌림으로 고통받았던 어린 시절, 외모와 능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청년 시절. 다행히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 준 사람 덕분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한 삶이었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안데르센의 많은 작품 중 성냥팔이 소녀가 기억에 남았던 건 성냥팔이 소녀는 짧은 동화임에도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소녀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죽었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하지만 소녀의 미소가 행복해 보였다 하여 죽음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죽음은 결국 비극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비극적 죽음을 맞은 소녀가 안타까웠습니다. 현실의 고통이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는 게 싫었습니다. 그때 생각난 작품이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입니다. 행복한 왕자에도 가난한 성냥팔이 소녀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행복한 왕자에서의 성냥팔이 소녀는 왕자의 도움을 받는 행운의 아이로 등장합니다. 그 후 성냥팔이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운명은 아니었겠죠.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구원하기 위해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데려왔습니다.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성냥팔이 소녀가 죽음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행복을 찾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오스카 와일드는  나와 같은 마음으로 행복한 왕자에 성냥팔이 소녀를 등장시켰는지 모릅니다. 그녀를 구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행복한 왕자는 안데르센에 대한 오스카 와일드의 오마주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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