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자신의 길을 선택한 후에야 내가 어떤 교육을 했나 바라볼 수 있었다. 교육이란 이름으로 내 욕망을 채우고자 욕심을 부렸던 건 아닌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는데 외면해 버린 건 아닌지 반성도 했다. 한때 거대하게 부풀었던 꿈이 자식의 길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허상 위에 놓였다는 걸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 경험은 잊지 못하겠다.
자식 교육은 어렵다. 더군다나 자기 주관이 뚜렷한 자식은 더욱 그렇다. 난 내가 내 자식 정도는 거뜬히 교육시킬 줄 알았다. '지금까지 배운 게 얼만데 설마 그 정도도 못하겠어'라는 자신감이 앞섰던 거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부모는 자식 앞에선 정서적으로 객관적일 수 없는 존재였는데 그 일을 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자식에게 욕심이 많은 부모라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런 부모는 한 마디로 그칠 이야기도 두 마디 세 마디의 사족을 달아 자식을 지치게 만드는 비범함을 발휘한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라는 훈계를 앞세워 자식과의 거리를 벌여 놓는다. 어쭙잖게 배운 부모가 무섭다는 말이 나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자식과의 관계 형성에 서툰 부모는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서라도 자식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전문가는 최소한의 간섭으로 자식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아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서툰 부모와 익숙한 부모 사이에 자리 잡은 어정쩡한 부모는 메타인지가 부족한 부모가 되어 자식 주변을 서성이다 자식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을라치면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이 되어 그들의 일을 간섭하려 든다. 자식의 일이라면 눈에 뵈는 게 없이 행동하지만 정작 그들에게선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할 수 있는 일에까지 개입하려 하니 그런 것이다.
자식들도 자신이 원하는 길이 있다. 부모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이다. 비록 그 길이 흐릿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위에 작은 등불 하나를 켜고 싶은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신만의 의지를 펼쳐보이고 싶은 것이다. 이럴 때 부모는 그들의 마음을 헤어려야 한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 태클을 걸면 자식은 부모를 피할 수밖에 없다. 관계의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동안
난
부지불식간에 자식의 다리를 여러 번 걷어찼다. 밝고 환한 길 위에 자식을 세우겠다며 다른 길을 가려는 자식을 끌고 와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포기 못한 길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내가 걸어갈 길도 아니면서 자식의 길이 잘못되었다고 트집을 잡았다. 인생을 먼저 살아 본 경험자로서의 선배는 특별한 힘이 없었는데 말이다.
자식과 떨어져 지내면서 그것을 보았다. 물리적 거리가 생기면서 정서적 거리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객관적인 눈이 생겼다. 자식의 길은 내가 원한 길이 아니었지만 길이 아닌 건 아니었다. 그저 다른 길일 뿐이었다. 내가 내 길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자식이 설 그런 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난 그 길의 미래를 모르겠다. 그것의 미래가 환하게 눈부실지 아니면 여전히 나의 시선 밖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흐릿함으로 남을지. 모르기 때문에 모르겠다. 그동안은 알지도 못하는 길에 고정관념을 가졌다. 내 인식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는 길만이 길이라 여겼기에 그랬다.
모두가 같은 길을 걷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탄탄대로의 길을 걷고, 누군가는 작고 평화로운 오솔길을 걸을 것이며, 다른 이는 가시덤불을 헤쳐야 하는 길을 걸을 수도 있다. 각자가 선택한 길을 걸을 뿐이다. 그러니 서로의 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필요가 없다. 모든 길에는 의미가 있고 그 길을 걷는 사람만이 그 길의 주인이 될 수 있으니까. 넓고 환한 길만을 정답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자식이 자아를 인식하고 성숙한 생각으로 미래를 선택하려 할 때 부모의 부재는 아이를 한 단계 성장시킬 수 있다. 강요하지 않는 인내는 관계를 단단하게 유지시킨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길이 있으니 그 위에 서는 것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것만이 부모의 사랑이고 든든한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