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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Nov 30. 2021

사랑이 폭행이 될 때

이해의 선물

 그 말이 가슴을 할퀴었다. 선명하게 자국도 남겼다. 무지하게 아팠다. 그녀의 말에 딸의 얼굴이 오버랩되지 않았다면, 눈물로 항거하며 온몸으로 울부짖었던 딸의 모습이 교차되지 않았다면 난 내가 한 행동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숨 막혔을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내 아이도 저런 심정이었을까? 사랑이란 허울 좋은 간섭 앞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싶을 만큼 억울한 심정이었을까?'


가끔은 자기 자신이 상황 속에 들어가 있어 일의 경과를 정확하게 보지 못한 때가 있다. 매사에 공정한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객관화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볼 필요가 있다. 타인이 되어보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때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보다 집에서 티브이로 시청할 때 선수들의 행동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한 발짝 물러나 보는 것이다.


그때 오은영 박사님께서 어떤 해법을 내놓으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김경란 아나운서의 말만이 선명하게 기억되어 나의 뇌리에 박혔을 뿐이다. 자신의 부모가 조금만 늦어도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는 말에서, 자신이 들어올 때까지 주무시지 않고 기다렸다는 말에서 그녀의 답답함을 느끼며 내 가슴으로 공감했을 뿐이다.


어쩌면 그날의 난 사이코였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윈 아랑곳 않고 내 감정에만 충실했으니 사이코였던 게 분명하다. 공포란 그런 것이다. 목을 조르는 사람이 있어 발악했는데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임을 알아차렸을 때의 놀라움, 그게 바로 공포다. 난 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숨조차 쉬지 못하게 억누르고 있었다. 그걸 사랑이라 여겼기에 그것이 고통이 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저 다른 부모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 생각했을 뿐이다.


"엄마, 왜 그래. 이게 뭐야. 32개야 32개. 친구들 앞에서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곧 간다고 했으면 기다려야 할 거 아냐. 10분도 아니고 1~2분 간격으로 도대체 왜 그러는데"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선 딸이 울었다. 내민 폰에는 나를 알리는 말 뒤에 부재중 32개가 떠있었다.


"네가 온다고 한 시간에 왔으면 이렇게 전화를 했겠어. 도착할 시간에 오지 않으니까 걱정이 돼서 그런 거잖아. 그러니까 전화를 하면 바로 받아야지 왜 전화를 안 받는 건데?"


"그래서 문자 했잖아. 좀 늦어질지 모르니 들어갈 때 전화한다고 문자 했잖아."


"문자를 어떻게 믿어. 문자는 다른 사람이 네 폰을 가지고 할 수도 있어. 네 목소리를 들어야 안심할 수 있는 엄마 마음은 모르겠어. 그리고 집안에 식구가 안 들어오는데 맘 편히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왜 못 자는데. 왜 못 자냐고. 내가 알아서 들어온다는데 뭐가 불안해서 못 자는데"


"그래 불안해서 그런다. 엄마는 세상이 무서워 불안해서 그런다. 그런데 넌 세상 무서운 줄 모르잖아. 엄만 그게 더 불안해. 겁 없는 네가 더 불안하다고. 차라리 늦더라도 데리러 가는 게 맘 편하니까 앞으로는 택시 탈 생각 하지 말고 전화 해. 12시도 좋고, 2시 3시에도 좋으니까 전화하라고. 알았어? 어차피 네가 들어올 때까지 엄마, 아빠는 잠 못 자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렇게 해."


늘 그랬다. 친구들과 과제하느라 늦어도, 시험 기간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 늦어도 우리 부부는 잠을 못 잤다. 딸이 자신을 어른으로 인정해주길 바라는 중에도 우리는 그 아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로만 봤다.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나약한 존재로 여겼다. 그게 사랑의 가면을 쓴 간섭의 모습이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는 불안한 마음을 잠식시키기엔 역부족이란 생각을 해서다.


김 아나운서의 말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그날의 행동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자식의 문제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회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와 같은 행동은 않겠네' 묻는다면 그 또한 의문이다. 지금이야 시야에서 멀어져 있어 객관적으로 답할 수 있지만 그 상황에 다시 던져진다면 글쎄......


하지만 분명한 건 다시는 32번과 같은 모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란 거다. 사랑을 표현한다며 믿음마저 의심했으니 말이다. 나란 인간이 어리석은 것인지, 내 자식 일이라 어려웠던 것인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중심 잡기는 힘들다. 사랑과 간섭 사이가 힘들다. 이해의 선물이라도 쥐어야 할 것 같다. 그것으로 힘겨운 줄타기의 무게 중심을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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