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성인이 되면 부모의 마음도 이해하고 자신의 일 정도는 스스로 알아서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그늘 아래에서는 절대 어른이 되지 않았다. 그늘에서 벗어나 뜨거운 햇빛에 얼굴도 타 보고, 비도 맞아 봐야 어른이 되는 모양이다.
가끔 나 자신을 탓해 본다.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워서 그렇다. 부모로서 최선을 다한다고 한 것이 아이를 망치는 일이 되었구나!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동안 나는 이게 최선이라 여기고 생활했는데.
그동안 난 내 몸이 좀 힘들더라도 아이를 위하는 일이라면 최대한 참아내려고 했다. 아침잠이 많은 아이가 식탁에서 졸고 있으면 아이에게 밥을 떠 먹여 가며 밥을 먹게 했고, 침대 위에는 그날 입을 옷을 다려 올려 놓아야 했다. 아이의 학교 모임이나 행사에는 여지없이 참여했다. 아이는 이런 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그게 옳은 일이고, 부모인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여겼기에.
하지만 여기서부터 우리의 관계는 꼬여가고 있었던 거 같다. 엄마의 지나친 관심이 싫다고 아이는 신호를 줬는데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무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엄마, 이제 학교 좀 그만 와. 요즘 학교 오는 엄마들이 어디 있어?"
나는 공개 수업이라도 있는 날이면 아침 시간의 여유를 버리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선생님과 아이들만이 수업할 걸 생각하면 내가 해야할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나의 생각이었을 뿐 아이도 선생님도 전혀 게으치 않은 일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오늘 아이가 또 내게 화를 냈다. 학교에 지각하게 생겼다며 택시비를 달라는 것이었다. 이번이 처음이면 늦지 않게 어서 가라며 돈을 쥐어 줬을 것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아이의 행동에 나도 화가 났다.
"엄마가 알람 맞추고 자라고 했지? 알람이 울려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이 누군데 엄마한테 화를 내는 거야?"
"그래도 깨워줬어야지. 10시에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한다는 걸 알면서 왜 안 깨워주는 거야?"
수업은 12시 시작이라 조금만 서둘렀어도 지각하는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깨워달라고 말을 하던가. 네가 일어나겠다고 알람을 맞추고선 왜 엄마를 탓 해"
"아, 알았으니까 택시비나 줘"
아~, 이 어이없는 말버릇. 택시비나 줘?
"엄마한테 말하는 말투가 그게 뭐야? 좀 공손할 순 없어?"
"알았으니까 돈이나 줘~. 늦었잖아~~"
아이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했다. 반성의 눈물은 아니다. 분하다는 표현이다. 늦어서 속상한데 잡아놓고 있으면 어떡하냐는 무언의 암시다. 힘이 빠졌다. 이런 실랑이는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할 뿐 아무런 이득이 없다. 돈을 주고 아이를 보냈다. 아이가 떠난 후 밀려오는 서러움에 나도 눈물이 났다.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다른 부모들이 자식에게 실망했을 때 내뱉는 이 말을 나도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오늘의 일은 늦었다고 투덜거리는 아이에게 어서 가라며 돈을 주었으면 아무 일 없이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 아이의 투정을 받아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나이가 되지 않았는가? 그동안 나의 과잉보호로 연약한 뿌리를 겨우 땅에 뻗은 아이를 아무 땅에서나 자랄 수 있는 튼튼한 나무로 키워야 했다.
오늘 같은 경우 생각이 있는 아이라면 대강 준비하고 나가야 했다. 굳이 화장까지 하면서 늦었다 투정 부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했다. 대학생이 되면 대화도 통하고, 부모의 마음도 이해해 주는 자식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나의 바람일 뿐 아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냥 성인이라는 이름표가 하나 붙었을 뿐 거기에 맞는 행동까지 얻은 건 아니었다.
지금 나는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자식을 탓하고 있다. 자기를 위해 헌신했는데 그 고마움도 모른다고 서운해하며 슬퍼하고 있다. 혹시 난 아이에게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한만큼 너도 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만약 그런 마음이었다면 나는 그동안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아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아이를 키운 나의 마음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순수한 마음이었다. 오늘의 속상함은 바르게, 책임있는 어른으로 자라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이로 인해 생긴 것이다.
난 아직 성인이 된 아이를 독립시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 거 같다. 그냥 두어도 되는 책상을 정리하고, 침대를 치우면서 다 큰 애가 방을 왜 이리 지저분하게 쓰냐며 투덜거리고 있다.
결론은 나 자신이 문제였다. 아직 아이를 성인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내 품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려는 내가 원인이었다.
내일은 아이의 방문을 열지 말아야겠다. 그 방이 쓰레기통으로 변해가는 한이 있어도 참아봐야겠다. 그러면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