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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Mar 07. 2022

각방이라도 쓰고 싶어

나만 코 고는 사람인 줄 알아? 당신도 코 골아.

혼자만의 감정싸움

'그럴 수 있지'라는 말로 모든 감정을 수용해 버리는 무던이(저입니다)들도 화가 날 때가 있다. 살얼음판을 걷듯 민감한 이(남편입니다)의 행동을 살피며, 사소한 것까지 인정하고 배려해 주었는데 정작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똑같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다. 자신의 무던함이 싫고 민감하지 못한 촉수가 원망스럽다. 가짜라도 '척'을 하고 싶어 진다. 예민한 척, 약한 척, 아픈 척, 슬픈 척을.


난 나의 모든 감정이 세월의 풍파에 깎이고 다듬어져 동글동글 매끈해진 줄 알았다. 웬만한 말 정도는 그 표면에 쭈르르 미끄러져 티끌 하나 남지 않을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한데 그런 게 아님을,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왔다. 순간을 건드리는 말은 따로 있었고, 찰나의 말은 모난 것 없는 감정에 균열을 냈다.


그때 남편이 내 감정을 건드릴 요량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그럼에도 자존심이 상해 버린 건 이제는 그런 말조차 인정해야만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데 있었다. 부인해도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닐 수 있다. 나이 든다고 모두가 코를 고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보편적으로 나이가 들면 코를 더 곤다고 하니 통계나 조사를 제시하지 않고도 이렇듯 자신 있게 떠들어대는 것이다.


나도 남편이 코 고는 소릴 들은 적이 있다. 그럴 때면 많이 피곤한가 보다 생각하며 안쓰러워했다. 고개라도 옆으로 돌려주고 싶었지만 민감한 사람이라 고개를 돌리면 깰까 봐 모른 척 잠이 들곤 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난 둔한 사람이었기에 남편의 콧소리 따위로 잠을 방해받지 않았으니.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내가 코를 곤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믿기 힘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많이 피곤했나 보네' '당신은 나보다 더 심하니까 걱정하지 마셔. 당신은 콧소리로 아주 시멘트를 뚫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곤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그 말이 몹시도 거슬렸다.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여자로 만드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코를 골았으면 '어제 우리 마누라가 몹시도 힘들었나 보네' 해야지, '아~. 당신 코 고는 소리에 어젯밤 잠 한 숨도 못 잤어.'라며 투덜거려야겠는가. 그것도 신새벽, 하루를 여는 창창한 시간에.


"흐으... 잘 됐네. 오미크론 감염됐을 때 각방을 써 보니 편하고 좋던만. 우리 앞으로 따로 자게. 각방 한번 써 보자고. 잠이 보약이라는데 코 고는 소리에 잠을 못 자서 되겠어?"


무던한 사람인 줄 알았던 나는 감정에서 만큼은 민감한 사람이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흔들리는 여린 잎이었다. 속이 다 보이는 유리 멘털이었다.


부부는 싸움을 한 후에도 각방을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다. 감정의 골을 남기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방을 같이 써 부부 싸움을 하게 생겼다면 서로의 건강과 감정 소비를 막기 위해서라도 각방을 써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퇴근 후 남편이 어떤 얼굴로 들어올지 궁금하다. 아무 말 없이 스리슬쩍 넘어가려 한다면?

아, 우리 부부 각방 살이 하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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