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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ul 15. 2022

버리기 아쉬운 건 쓰레기일까, 골동품일까?

책을 정리하다

생각이 흘러내리고 있다. 선명하게 모습을 갖추지 못한 언어들이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소리 소문 없이 녹아내린다. 읽고 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자 다짐했는데 써내지 못한 생각들은 머리가 뜨겁다며 아지랑이로 피어올라 흔적 없이 사라지고, 겨우 읽어내는 것으로 하루하루의 루틴은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더워서인가? 아니면 지난주 무리하게 몸을 쓴 탓인가? 이마에 주름이 잡히도록 힘을 줘 보지만 눈은 요지부동이고 근육들만이 부지런히 몸을 놀린다.


책상 위에는 잠을 깨울만한 쨍한 물조차 놓여있지 않다. 뜨거움이 온도를 내린 미지근한 물이다. 너무 찬 물은 몸에 좋지 않다는 억지 믿음으로 더운 날에도 처음 마시는 물은 늘 미지근한 물이다. 근거가 있는 믿음인지 모를 일인데 말이다. 아무튼 물은 미지근하고 내 생각 또한 냉철하지 못한 채 흐리멍덩 미지근하다.


지난주에는 학원 인테리어를 손봤다. 미루고 미루다 행한 일이다.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책을 옮기고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 끝도 없이 미루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 옆 학원이 확장 공사를 한다며 2주 정도 시끄러울 거라는 말을 전해왔다. 잘 됐다 싶었다.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이참에 숙원사업 하나를 해결하자 결심했다. 책을 정리해야 해. 책을 정리하자.


한참 동안 책들을 노려보다 정리는 모두 내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남겨야 할 책도 버려야 할 책도 내가 결정해야 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잡다한 물건과 책들을 빼내고 공사를 한 후 다시 정리해야 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눈앞이 깜깜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움직임이 수월한 물건과 책꽂이만 살짝 옮겨 벽과 천장을 도배하고 바닥 공사는 하지 않는 걸로 결정을 봤다. 작정하고 공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니 이 정도면 됐다 다독인 것이다. 그렇게 공사는 시작되었다.


벼락치기로 시작한 공사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공간이 넓지 않아 그럴 수도 있고, 남이 한 일이라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이틀이란 짧은 시간 동안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이제 뒷정리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뒷정리만'이라고 표현하기에 그것의 덩치는 너무 컸다. 버릴 책은 빼내고, 남길 책은 분류하여 다시 꽂고. 인간에게 두 손의 자유가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별로 크지도 않은 손이 너무도 많은 일을 해냈다. 어쩌면 우공이산도 손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결코 의지만으론 불가능한.


그렇게 묵묵히 나의 일을 열정을 쏟고 있을 때 남편이 진심을 담아 아껴둔 잔소리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읽지도 않은 책은 뭐하러 꽂아두었느냐. 버릴 건 좀 버리고 살지 그렇게 쌓아두면 골동품이 되냐, 결국 이렇게 버리게 되니 쓰레기 아니냐. 클라이맥스는 냉장고를 열었을 때다.


"이 단무지는 뭐야?"

"김밥 포장해 올 때 가져온 거야. 라면 먹을 때 먹을라고. 새 거."

"그럼, 이건?"

"미숫가루잖아(어머, 저건 작년에 먹다 남아 냉장고에 넣어둔 건데). 가루잖아. 냉장고에 있었으니까 괜찮아."

"이건?"

"청귤청이야. 맛있어서 집에서 가져왔는데..."

"언제?"

"작년에."

그 후에도 냉장고에서는 많은 것들이 쏟아졌다. 유통기한이 지난 감기약과 소화제. 심지어 먹지도 않는 우황청심환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알 수 없는 아이스크림까지. 졸지에 난 쓰레기 수집가 꼴이 되었다.

"좀 버리고 살아. 아끼다 똥 된다는 말 몰라?"

"혹시, 또 언젠가 쓰임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필요하면 그때 또 사고 당장 쓰지 않는 건 그냥 버려. 집에도 버리지 말라고 해서 쌓아둔 거 있잖아. 에어컨 하고 식기세척기, 전자레인지, 또 선풍기는 어쩔 건데?"

"그건 다르지. 그거 다 골드스타야. LG가 아니라고. 이제 LG에서 식기세척기와 선풍기는 나오지도 않아. 에어컨은 초기 작품인데 어떻게 버려. 그것들은 골동품이야."

"골동품이라면 누군가에게 쓰임이 있어야 골동품이지. 그걸 어디다 쓸 건데? 창고에 처박아두는 게 골동품이야. 집에 가면 다 버릴 줄 알아."


정리하느라 힘이 드는지 집에 있는 물건까지 들먹이며 생트집을 잡았다. 괜히 나 때문에 고생을 하는구나 싶어 마음껏 대꾸할 수도 없었다. 페인트 냄새에 머리까지 아팠다.

공사중. 머리가 어지럽다.
내 공간. 일을 떠나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게 좋다.

많은 걸 비웠다. 같은 물건인데 한결 깔끔해졌다. 비워내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비워내니 새로워졌다. 물건을 비우고 생각해 본다. 나 자신은 어떨까? 나에게는 비워야 할 것이 없을까? 나에게도 비워야 것이 많았다.


내가 비워야 할 것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잡스런 생각들.

남편에게, 시부모에게, 엄마에게 서운해 담아두었던 마음들.

친구나 주변인에게서 받았던 상처의 말들.


내 마음속에서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이런 것들은 버려야 할 쓰레기일까, 두고두고 지켜내 기록해야 할 골동품일까. 정답을 콕 집어 말하기는 힘들어도 물건 비워내듯 비워낼 수 없다는 것만은 희미하나마 해답처럼 선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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