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흘러내리고 있다. 선명하게 모습을 갖추지 못한 언어들이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소리 소문 없이 녹아내린다. 읽고 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자 다짐했는데 써내지 못한 생각들은 머리가 뜨겁다며 아지랑이로 피어올라 흔적 없이 사라지고, 겨우 읽어내는 것으로 하루하루의 루틴은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더워서인가? 아니면 지난주 무리하게 몸을 쓴 탓인가? 이마에 주름이 잡히도록 힘을 줘 보지만 눈은 요지부동이고 근육들만이 부지런히 몸을 놀린다.
책상 위에는 잠을 깨울만한 쨍한 물조차 놓여있지 않다. 뜨거움이 온도를 내린 미지근한 물이다. 너무 찬 물은 몸에 좋지 않다는 억지 믿음으로 더운 날에도 처음 마시는 물은 늘 미지근한 물이다. 근거가 있는 믿음인지 모를 일인데 말이다. 아무튼 물은 미지근하고 내 생각 또한 냉철하지 못한 채 흐리멍덩 미지근하다.
지난주에는 학원 인테리어를 손봤다. 미루고 미루다 행한 일이다.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책을 옮기고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 끝도 없이 미루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 옆 학원이 확장 공사를 한다며 2주 정도 시끄러울 거라는 말을 전해왔다. 잘 됐다 싶었다.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이참에 숙원사업 하나를 해결하자 결심했다. 책을 정리해야 해. 책을 정리하자.
한참 동안 책들을 노려보다 정리는 모두 내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남겨야 할 책도 버려야 할 책도 내가 결정해야 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잡다한 물건과 책들을 빼내고 공사를 한 후 다시 정리해야 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눈앞이 깜깜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움직임이 수월한 물건과 책꽂이만 살짝 옮겨 벽과 천장을 도배하고 바닥 공사는 하지 않는 걸로 결정을 봤다. 작정하고 공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니 이 정도면 됐다 다독인 것이다. 그렇게 공사는 시작되었다.
벼락치기로 시작한 공사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공간이 넓지 않아 그럴 수도 있고, 남이 한 일이라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이틀이란 짧은 시간 동안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이제 뒷정리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뒷정리만'이라고 표현하기에 그것의 덩치는 너무 컸다. 버릴 책은 빼내고, 남길 책은 분류하여 다시 꽂고. 인간에게 두 손의 자유가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별로 크지도 않은 손이 너무도 많은 일을 해냈다. 어쩌면 우공이산도 손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결코 의지만으론 불가능한.
그렇게 묵묵히 나의 일을 열정을 쏟고 있을 때 남편이 진심을 담아 아껴둔 잔소리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읽지도 않은 책은 뭐하러 꽂아두었느냐. 버릴 건 좀 버리고 살지 그렇게 쌓아두면 골동품이 되냐, 결국 이렇게 버리게 되니 쓰레기 아니냐. 클라이맥스는 냉장고를 열었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