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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Apr 04. 2023

벗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책

이덕무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 책만 보는 바보

좋아하는 책이 있다. 책의 내용이 좋고,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들의 삶의 태도가 좋아서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동안 등장인물들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삶을 나의 삶에 적용해 보려 애썼다. 쉽지가 않았다. 사는 동안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행복의 조건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접근해 온 많은 유혹들을 쉽사리 물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건 핑계에 불과하다. 나는 그들처럼 욕심 없는 사람으로 살 자신이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난 물질의 유혹과 조우해 그것이 주는 행복에 젖어버렸다. 이제 난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부럽다.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했던 사람들.

벗이 있어, 벗들과 나눌 책이 있어 행복했던 사람들.

그들이 지금을 살아간다면 이런 나라도 친구로 받아줬을까?


내가 사랑하는 책.

내가 짝사랑하는 책.

책 속 인물들이 좋아 글을 쓴 작가까지 좋아하게 만든 책.

바뀌지 않을 나의 블로그 프로필.

그는 바로,

<책만 보는 바보>


책 속에는 이토록 따스한 말들이 숨쉬고 있다. 아무튼, 책만 보는 바보다.



이 방의 문고리를 잡을 때마다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등을 보이며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이 모두 한꺼번에 나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만 같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책 속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마주치는 설렘.

(p.13)



나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며 싱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벗이 새삼 고마웠다. 흉년이라 어렵긴 마찬가지지만, 그는 나처럼 굳이 책을 팔아야 할 처지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맹자에게 밥을 얻어먹었노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떠벌리긴 했어도 내가 얼마나 서글프고 부끄러운 심정으로 찾아왔는지, 유득공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선뜻 자신의 책까지 내다 팔아 나와 아픔을 같이 하고, 또 나의 부끄러움을 덜어 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역시 무척이나 책을 아끼는 사람이었으나,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이러한 벗들과 책이 있었기에, 나의 가난한 젊은 날은 그리 서럽거나 외롭지만은 않았다.

(p.34)


 

내가 윤회매를 만들기를 좋아한 까닭은, 살아 있는 꽃 못지않은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모으고 매달릴 수 있는 그 일이 좋아서였다. 나는 윤회매를 만드는 손끝에 나 자신을 모두 실었다. 가난한 살림도 잊고, 어찌 될지 모른 내 앞날도 잊고, 꽃잎을 만들고 있는 내 존재마저 잊었다. 오직 내 손에서 피어날 맑고 투명한 잎만을 생각했다.


백탑 아래 작은 방에서 내가 피워놓은 매화를 바라보며 벗들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매화나무에 꽃이 피었을 때, 꽃은 자신이 꿀과 밀랍이 되리라 알았겠습니까. 더욱이 그 꿀과 밀랍이 다시 매화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알기나 했겠습니까.”

“처음부터 하나로 정해진 게 아니라, 살면서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벗들도 나처럼, 자신이 아니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눈부신 꽃으로 다시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는지 모른다.

(p.57)



사람들은 박제가의 됨됨이가 글러 먹었다고 했다. 도무지 위아래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보면 누구에게나 눈을 부라리며 따지고 들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 생각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위아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정말 싫습니다. 예의를 지키라는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집안이나 신분,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이는 것을 정하라는 게 아닙니까? 옳고 그름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여야지. 어찌 그 사람의 껍데기만 보고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p.63)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유득공이 한쪽 구석에 놓아둔 책을 가지러 가다가 그만 등잔을 넘어뜨리고 만 것이다. 한창 바느질을 하고 있던 치맛감에 등잔 기름이 묻어 얼룩이 졌다. 새어나온 기름이 다 지어 곱게 접어 둔 저고리에까지 번졌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치마저고리에 공들인 어머니의 수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모자로서는 그런 고급 비단을 물어낼 능력도, 마련할 길도 없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었지만 숨이 턱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더군요. 그런데 어머니가 제게 뭐라고 하신 줄 압니까?”

유득공을 그때 일을 생각하니 다시 목이 메는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왕 엎질러진 것, 어쩌겠느냐?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렇게 말씀 하셨지요.”

이튿날 어머니는 바느질을 맡긴 집을 찾아가 사실대로 이야기 하고, 옷값만큼의 대가를 바느질삯으로 갚기로 했다.

(p.88)



“하늘 아래 가장 고귀한 우정은 가난할 때의 사귐이라 합니다. 벗과의 사귐은 술잔을 앞에 두고 무릎을 맞대고 앉거나 손을 잡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차마 말하고 싶지 않는 것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것, 여기에 벗과의 진정한 사귐이 있습니다.”

(p.121)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벗들과 함께 있으면 가슴속에 간직한 포부가 두루마리 종이처럼 저절로 풀려나왔다. 가슴속에 담긴 울분을 토해 놓고 위로받는 것도 벗들에게서였다. 앞으로 다가올 우리들의 시간이 조금은 나아지리라 서로 믿고 기대며 견딜 수 있는 것도 벗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머나먼 산골짜기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동수의 마음이 막막하기만 하지 않은 것도, 여기 이곳에 우리들이 그의 자리를 든든히 남겨 놓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p.122)



비단 코끼리에 대한 것뿐이겠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날의 선입견에 갇혀 있으면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게 된다. 세상은 늘 이대로 계속되어야 하고, 학문도 옛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외우는 것이 제일이라 여기게 된다. 글도 옛사람의 것을 본떠지어야만 제대로 된 글이라는 대접을 받는다. 사람과 사귈 때도 신분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을 먼저 보게 되니, 참다운 벗을 만나 마음을 나누기도 어렵다.

선입견은 결국,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과 사물의 본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편견이기도 하다.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은 새로운 활기라고는 없는 세상, 변화를 거부하는 낡은 것들로만 가득한 세상일 것이다.

(p.177)


글이 길어져 줄여야 했지만 빼고 싶지 않아 그냥 싣고 만다. 안소영 작가는 은혜로움이다. 이런 게 짝사랑이다. 그녀는 모르지만 나는 설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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