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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an 26. 2023

유진 오닐의 비극적 가족사, 밤으로의 긴 여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에는 가족이란 이름의 특별함이 숨어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함께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핏줄을 타고 흐른 것이다. 하지만 늘 그럴까? 피로 맺어졌다 하여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흔들리는 가족도, 손을 놓아버린 가족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가족의 허물을 내보이기란 쉽지 않다. 그 원초적 관계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해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한 작가가 있다.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쓴 유진 오닐이 바로 그 작가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유진 오닐이 작품을 탈고하면서 아내 칼로타에게 자신의 사후 25년 동안은  작품을 발표하지 말고, 그 이후에도 절대 무대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 정도로 이 작품은 유진 오닐에겐 사적이면서 고통스러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아내 칼로타가 유진의 뜻에 따르지 않고 1956년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스웨덴의 일부 평론가들에게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이스퀼로스와 셰익스피어를 잇는 최고의 극작가란 평을 듣게 했다.


미국이 아닌 스웨덴에서 초연을 한 작품은 같은 해 미국 예일 대학 출판부에서 책으로 출간되었고, 뉴욕에서는 스웨덴에 이은 공연을 했다. 이후 <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의 대표작이 되어 1957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밤으로의 긴 여로>가 유진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품이었는가는 그가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유진은 칼로타에게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자신의 묵은 슬픔을 눈물과 피로 썼다고 말한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 없었던 가족의 비극을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글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의 생명의 기운을 쪽쪽 빨아 탄생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에 등장하는 티론 가족은 유진 오닐의 가족과 다름없다. 다만 어머니의 이름을 유진 오닐의 어머니 이름인 엘라가 아니라 메리라 쓴 것이나, 두 살 때 홍역으로 죽은 둘째 아들의 이름이 에드먼드가 아니라 셋째 유진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니 티론 가족의 셋째 에드먼드가 유진 오닐이라 생각하며 읽으면 작품의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총 4막의 희곡이다. 제1막에서 제4막까지가 하루의 이야기인 것을 보면 이 책은 하루 동안 티론 가족에게 벌어진 일을 쓰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티론 가족의 삶은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서로를 배려하는 듯하면서 상처를 주고, 서로를 탓하면서도 금세 자책을 한다. 삶이 가면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한다. 그러니 그들 말 중 어느 것이 진심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소리를 질러서라도 진심을 말하고 문제를 해결하면 좋을 텐데 회피가 답인 것처럼 문제를 빙빙 돌려 피한다. 곪은 상처를 터뜨리지 않고 보이지 않게 꼭꼭 싸맨다.


누구의 잘못일까? 가난하고 무지한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으로 연극배우로는 성공하지만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온전한 가정을 만들지 못한 아버지 제임스 티론의 잘못일까? 마약 중독자가 되어 자식들을 떨게 한 어머니 메리의 잘못일까? 술과 여자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인생을 낭비하는 첫째 제이미의 잘못일까? 아니면 나약한 마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막내 에드몬드의 잘못일까? 누구 하나 정상적인 사람이 없는 것 같은 티론 가족이지만,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의 삶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 제임스 티론은 평생 집도 없이 연극만 하며 떠돌다 바닷가 주변에 여름 별장 하나를 마련한다. 티론의 여름 별장은 안개가 장막처럼 드리워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안개는 티론 가족의 마음처럼 뿌옇고 음산했다. 이 별장에 중독 증세가 완화되어 돌아온 메리와 방랑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에드먼드, 가난이라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가족들에겐 병적으로 인색하지만 땅 사는 일에는 관대한 제임스, 평소 모든 일이 불만투성이인 제이미가 함께 생활하기 위해 모인다.


작품은 하루의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하루는 몇 년의 일상을 보는 것처럼 길게 느껴진다. 그들은 도미노처럼 서로의 인생을 망치고 있었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일은 꼬이고 꼬여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젊고 매력적이었던 연극배우 제임스에 반해 결혼한 메리는 남편을 사랑했기에 싸구려 호텔 방을 전전하면서도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친정에 맡겨둔 둘째 유진이 홍역에 걸려 죽으면서 메리는 떠돌아 다니는 삶에 염증을 느낀다. 자신이 아들을 돌보지 않아 죽었다는 자책과 자신에게 그런 삶을 살게 한 제임스, 병을 옮긴 첫째 제이미를 원망한다. 유진을 잃고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셋째 에드먼드가 생겼고, 에드먼드를 낳은 후 진통이 가시지 않아 맞게 된 모르핀은 메리를 마약중독자로 만들었다.


첫째 제이미는 자신 때문에 둘째 유진이 죽었다는 생각에 절망하고, 엄마가 마약 하는 모습을 본 후 좌절한다. 셋째 유진 또한 자신을 낳고 마약 중독자가 된 엄마에게 상처를 받고 방황을 한다. 그들은 서로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돌팔이 의사를 엄마에게 소개한 아버지를, 마약 중독자가 된 엄마를, 동생에게 병을 옮긴 제이미를, 세상에 태어나면서 엄마를 마약 중독자로 만든 에드먼드를. 그 누구도 다른 가족에게 일부러 불행을 전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불행의 전파자가 되었다. 서로를 망치는 존재가 되었다.


티론 가족의 불행은 작정하고 벌인 일이 아니었기에 안타까웠다. 미워하고 싶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그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미워하는 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엄마의 회복을 기대했지만,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찮은 감기이길 바랐던 에드먼드의 병은 악화되었고, 제이미는 무능했다.


가족이었으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티론 가족에겐 따스한 냉정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가족을 위해 돈을 써야 했고,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마약 치료를 위한 의지를 보여야 했다. 에드먼드는 나약한 마음을 버리고 병을 이길 수 있다는 의지를 가져야 했고, 제이미는 착한 성격을 드러내어 열심히 생활해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하지 않고 덮어서는 안 됐다. 이런 티론 가족의 불행이 불행으로만 끝나지 않고 기록으로 남았다는 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가족을 외면하지 않고, 문제를 바로 바라본 사람이.


유진 오닐이 살아생전에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묵은 슬픔, 비극의 가족사.

눈물과 피로 썼다는 <밤으로의 긴 여로>. 


이 책을 읽고 가족의 일원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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