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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an 20. 2023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죽음의 미학

화해

생과 사, 그 사이의 삶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에세이 같은 소설이다. 너무 에세이 같아 에세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자꾸 소설이라고 떼를 쓰는 아이 같다.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작가의 말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상욱씨를 작가의 아버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누가 뭐래도 고상욱씨는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니까.


나는 빨치산이란 말이 이토록 유쾌하게 쓰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한때의 금기어가 너무도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니 말이다. 드러내니 별 거 아닌 말을 우리는 참으로 오랫동안 두려움에 떨며 숨겨왔던 거 같다. 빨치산은 특별한 사람도, 이념에 인정마저 빼앗긴 냉정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들은 그저 평범한 우리네 모습과 너무 닮은 아니, 우리네 모습 그대로였는데.


책은 첫 문장에서부터가 놀라웠다. '아버지가 죽었다'. 작가가 까뮈를 오마주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 문장이었다. 하지만 다음 문장에서 곧 이방인과는 전혀 다른 결의 작품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니. 만약 이 문장을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고 말했다면 얼마나 심심한 작품이 되었을까.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기에 무겁거나 어두웠을 작품이 딸랑거리는 방울을 단 것처럼 경쾌하게 울렸다.


이 작품은 아버지가 활동했다는 백아산에서 '아'와 어머니가 활동했다는 지리산에서 '리'를 따 이름을 지은 '고아리'가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례식장에서 보낸 3일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3일이라는 시간 동안 아리는 아버지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다. 그리고 아버지와 다양한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을 장례식장에서 만나며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늘상 사회주의와 유물론을 입에 달고 살았던 아버지는 사상과는 전혀 무관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 자식을 무서워했던 나약한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을. 빨치산도, 빨갱이도 아닌 그냥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것을. 죽음 앞에서 아리는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며 화해를 한다.


책을 읽은 나에게 누군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두말 않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티키타카와 귀에 탁탁 꽂히는 사투리라고 말할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다툼은 우스웠고, 귀를 감고도는 사투리는 위로가 되었다. 사투리가 옆에서 다정하게 어깨를 쓰다듬는 거 같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모든 게 형언할 수 없는 작가의 표현력 덕분이리라.


책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식이다. 갈 곳이 없어 헤매는 방물장수를 집에 들였을 때 어머니는 반대를 한다. 방도 없는데 사람을 들였다면서. 그때 아버지가 말한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심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중략-

열일곱의 나는, 방물장수 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 냉큼 꼬리를 내리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p13-


아버지가 아리의 외모를 지적하는 부분도 재밌다.


 "내 외모가 그럼 어느 정도인데요?'

 아버지는 텔레비전 화면 속의 심사위원들처럼,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그래서 더 냉정한 눈빛으로 내 전신을 천천히, 내가 정말 미스코리아 대회라도 나간 양 긴장될 정도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혀를 차며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쯧! 하의 상은 되겄다."

 하의 상, 상중하로 나눈 중에서 하의 상, 그러니까 9등급 중에 7등급이라는 뜻이었다.

-p31-


그렇게 아리는 하의 상이 되었다. 그러니 작가는 아리가 아니다. 내 눈에 작가는 아무리 낮게 봐도 상의 하는 되어 보여서다. 프로필 사진이 고도로 잘 나왔다 해도.


이런 재미있는 대화가 오가는 속에도 아픔은 있어 이 작품이 웃음으로만 끝나지 않고 감동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빨치산 출신의 형을 평생 원망하며 살아야 했던 아리의 작은 아버지나 육사에 합격하고도 작은 아버지가 빨치산이라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된 큰집 오빠 길수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난 아리의 엄마가 위암 말기인 길수의 손을 잡고 "워쩌끄나 워째야 쓰끄나"를 후렴구처럼 탄식했을 때 눈물을 찔끔했다. 저 말을 하는 아리 엄마의 표정과 행동이 생생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저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어린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누군가 나에게 저런 말을 했다. 그래서인지 아리 엄마의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내 몸에 스며들었다.


책 속의 아리는 말한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p252-


책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아리의 입을 빌려 자신의 아버지를 얘기한 작가가 이제는 마음이 편해졌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빨치산이라는 회오리바람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에세이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글을 쓴 것이 잘 한 일이라 생각하기를. 그리고


다짐해 본다. 사람이 오죽하면 글것냐.란 말을 할 수 있는 달관자의 삶을 나도 한번 살아봐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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