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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un 25. 2021

작가님, 좋은 인연 맺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택배라고 다 같은 택배가 아니지

택배 하나를 받았다. 검은색 뽁뽁이 포장지에 싸인 직사각형의 물건이었다. 기사님으로부터 물건을 받아드는데 주책맞게도 웃음이 줄줄 새어 나왔다. 포장지 속 내용물이 짐작되어서다. 택배라는 건 그 자체로도 기분 좋지만 안에 담긴 물건이 무엇이냐에 따라 기쁨의 강도가 전혀 달라진다. 검은색 뽁뽁이를 받아 들었을 때 내 기쁨의 강도는, 신나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말개진 산 위로 살며시 피어오른 무지개의 여리함을 봤을 때의 기분이랄까, 세상 환해진 기분이었다.


클러치백이라도 잡은 듯 모서리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포장지 뒷면의 찍찍이를 조심스레 뜯었다. 그리고 문제의 내용물을 꺼냈다. 달랐다. 내가 가진 것과 달랐다. 역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며칠 전 작가님이 인스타에서 이벤트를 실시했을 때만 해도 '제발 당첨되게 해 주세요'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막상 당첨되고 보니 내가 다른 사람의 행운을 가로챈 건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에 휩싸였다. 나는 책을 읽었고 작가님의 생각에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는데 그 생각에 동참할 또 다른 사람의 행운을 가로챘다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받고 싶었다. 작가님의 친필 사인도, 한정판으로 제작되었다는 옷을 입은 책도.


정말로 책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모습에 옛 친구를 만난 것마냥 기분이 짠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많이 봤던 모습인데 참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포장지로 책에 옷을 입히며 책을 아꼈다. 달력의 하얀 면이 포장지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고, 알록달록한 포장지가 달력을 대신한 시절도 있었다. 나중에는 책의 크기에 맞춰 제작된 비닐 포장지도 생겨났으니, 이 비닐 포장지는 자르거나 접을 필요가 없는 신문물이었다.


그랬던 시절, 책이란 건 도서관에서나 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 집에나 책이 흔하게 넘쳐나고 있다. 한 번 읽히고는 책장에서 잠들거나 버려지기가 부지기수인 책들이다. 책의 소중함이 사라진 것이다. 위편삼절이란 말은 몇 천 년 전에나 가능했던 말이 되었다. 그런 책이 2021년에 옛 친구를 만났다. 자신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며, 귀한 글은 귀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말해주는 친구를. 자신을 감싸주는 그 친구가 책은 얼마나 고마웠을까?


좋은 인연 맺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 포장지에 감탄하며 책 표지를 넘겼는데 책 속에 더 귀한 것이 들어있었다. 작가님이 나에게 남긴 말이었다. 글을 읽으며 감동했고 글씨체에 미소 지었다. 기시감, 꾹꾹 눌러 단정하게 써 내려간 글씨체가 너무도 익숙했다. 난 작가님의 글씨를 본 적이 없는데 이건 뭐지 싶었다. 순간 떠오르는 얼굴, 내 아들이었다. 작가님의 글씨는 내 아들의 글씨와 닮아있었다. 갑자기 친근감이 몰려왔다. 같은 공간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작가님은 여전히 나에겐 먼 사람이었는데 글씨체 하나가 그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작가님도 나처럼 떡볶이를 좋아한 사람이라는 걸, 어린 시절에 마신 음료수 하나도 추억으로 간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작가님이 글씨체를 바꾸기 위해 연습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난 작가님의 글씨체가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글씨첸데 바뀌면 참 아쉬울 것 같다. 작은 택배 하나로 행복한 하루였다. 택배라고 다 같은 택배는 아니었다. 책을 받아들고 고마운 마음에 나도 한 마디 남긴다.


작가님, 좋은 인연 맺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경호 작가님의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 포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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