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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an 02. 2023

영웅과 그의 어머니가 부른 노래

아무나 영웅의 어머니는 될 수 없다

음악이 좋은 것은 어떠한 준비를 하지 않아도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이, 드라마나 영화에 집중하는데 그 사이를 파고든 음악이 난데없이 가슴을 때리며 파문을 일으킬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들을 때는 자세를 잡고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거나, 생각을 모아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일 따위의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몸은 반응을 한다. 음이 흐르면 가슴이 열리고, 귀가 느낀다. 입이 씰룩거리고, 눈은 아련해진다. 자연스럽게 오감이 살아나 꿈틀거리는 것이다. 거기에 영상이 더해지면?


영화 '영웅'을 보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뮤지컬 영화 '영웅'을 보았다. 의도하고 본 것은 아니다. 카메론 감독을 좋아하지만, 연말이라 화려한 영상에 취하기보단 마음을 가다듬는 영화를 택하고 싶었다. 영웅을 보고 난 지금은 시도 때도 없이 '장부가'를 흥얼거린다.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야'가 아닌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를 가슴에서 굴리며 뱉어내고 있다. 평소 큰 뜻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품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말이다.



'영웅'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일본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죽음을 맞이한 순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는 뮤지컬 영화다.



영화는 안중근 의사가 동지들과 눈 내린 들판에서 단지동맹을 맺는 것으로 시작한다. 안 의사와 동지들의 손가락이 잘리면서 새하얀 눈밭은 피로 낭자하고, 그 피로 쓴 '대한 독립'이란 글자는 태극기 안에서 당당하게 내걸린다. 그리고 울려 퍼진 다짐의 노래. 첫 장면부터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나 그 장엄함은 다음 장면에서 이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안 의사에게 치명적 타격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안 의사 부대는 함경도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포로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확보한 포로를 동지들이 죽이려 할 때 안 의사가 말했다.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없다. 만국 공법에 따라 포로를 가두거나 돌려보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포로들은 풀려났다. 이후 그가 한 일은 안 의사에게 크나큰 화근이 되어 돌아온다. 풀려난 포로가 부대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안 의사의 부대원들이 죽게 된 것이다. 안 의사의 행동은 의로웠지만 제국주의자들에겐 통하지 않은 정의였다. 


그 후 안의사는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일에 목숨을 건다. 그 1년의 과정이 영화가 된 것이다. 안 의사는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1909년 10월 만주의 하얼빈에서. 그날 플랫폼에 울려 퍼진 '코레아 우라'는 죽어간 동료에 대한 그의 속죄였는지 모른다.  

영화는 뮤지컬 영화답게 노래가 모든 장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빙의한 듯한 정성화 배우의 섬세하고 웅장한 목소리는 숨을 멎게 했고, 김고은 배우의 찢어지는 듯한 처절함은 보는 이의 가슴을 쥐어뜯게 만들었다(전에도 느꼈지만 김고은 배우는 연기를 너무 잘한다. 연기가 좋으니 노래가 더 슬펐다). 


그리고 안 의사의 어머니, 나문희 배우가 부른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는 결국 나의 눈물샘을 터트리고 말았다. 손수건을 가져가지 않아 코를 씰룩거려 울지 않으려 했는데 흘러내린 눈물이 마스크에 젖어 티슈를 꺼내야 했다. 배냇저고리에 쓰인 안응칠이란 이름이 안중근처럼 묵직하지도 든든하지도 않아 마음이 아팠다. 그 이름은 배냇저고리처럼 작고 여렸다. 


영화에서 안중근 의사는 큰 뜻을 품고 장부가를 불렀고, 그의 어머니는 목숨 따윈 구걸하지 말라며 편지를 썼다. 영웅은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몸을 빌어 태어난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장면이었다. 영웅이나 영웅의 어머니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영화 '영웅'을 애국심의 발현으로 보러 갈 필요는 없다. 다만 가슴을 울리는 배우들의 절절한 노랫소리를 듣고 싶다면 손수건 하나 정도는 얌전히 넣고 갈 필요가 있다. 모르긴 해도 그들의 노래를 듣는 순간 미처 챙기지 못한 애국심이 치고 올라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영웅을 영접하는 기쁨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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