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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an 10. 2023

부끄러워라. 간사한 이 마음

아이고, 부끄러워라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기도 하지. 아들을 신병훈련소에 보낼 때만 해도 나의 방자한 행동 하나로 아들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세상 착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아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니 단단하게 긴장됐던 마음이 봄눈 녹듯 녹아내려 흐물거린다.


지난 26일 훈련소에 입소하는 아들을 보며 아들의 시간도 빨리 흐를 수 있을까, 아들이 없는 그 시간을 나 자신은 견뎌낼 수 있을까,로 절망했는데 떨어져 있는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 순간 그것들은 일상이 되어 예전의 시간틀 속에 짜 맞춰져 버렸다.


군대 입대 전 잠시 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 적이 있었다. 빼빼한 몸이, 아토피로 고생한 경험이 면제부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바람인 동시에 미련이었다. 아들이 더 강해지고 건강해질 기회를 발로 차려는 무지와 같았다. 나는 그 큰 깨달음을 아들이 보낸 소포를 뜯고서야 알았다. 내 손이 아니라 아들의 손을 거쳐 정리된 옷을 보면서 말이다.


아들이 군대에 가기 전부터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군인이 된 아들이 자신이 입었던 사복을 보냈을 때의 상황이었다.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드라마 속 한 장면을 연기하듯 아들의 옷을 부여잡고 흐느꼈던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연기였다. 바로 컷 당할 오버액션이었다. 감정의 과잉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창피함으로 오그라들게 만든다는 걸 몰랐던 거다. 그것을 내가 연출하고 있었다. 나의 상상 속에서 신파 연기를 말이다. 


하지만 다행이지 뭔가. 그것이 머릿속에서만 작동된 상상으로 그쳤으니.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어휴, 그 망신을 어쩔 뻔했나. 모르긴 해도 식구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 되었을 것이다. 요즘 시대의 엄마들은 아들이 군대에서 보낸 옷을 끌어안고 오열하지는 않는 거 같다. 그저 대견함에 미소를 지었으면 몰라도. 아닌가? 우는 사람도 있으려나. 하지만 난 울지 않았다. 울 줄 알았는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다. 박스는 반가웠고, 내용물은 대견했다.


우선은 아들의 옷이 담긴 박스가 요즘 군대를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웠다. 표면에 그려진 캐릭터가 어찌나 귀여운지 쓰담쓰담하고 싶을 정도였다. 테이프를 쭉 뜯어내고 박스를 열었다. 아들의 묵직한 코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코트는 지퍼까지 잘 잠가져 개켜 있었다. 코트를 집어 들어 꺼내고 다시 박스를 들여다보니 가지런히 놓인 바지와 티, 신발 그리고 속옷이 보였다. 


그런데 속옷 하나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속옷은 커다란 번데기처럼 달랑 웅크리고 있었다. 번데기를 꺼내 남편에게 보였다. 번데기의 정체는 아들의 팬티였다. 아들은 생전 팬티를 접은 적이 없었다. 내가 속옷을 정리해 놔도 이것저것 만지다 벌러덩 펼쳐놓는 게 흔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돌돌 말아 잘 끼워 맞추기는커녕 네모나게 접어본 적도 없다. 그런 아들이 생전 하지 않은 일이 했다. 엄마가 아무리 말해도 하지 않던 일을 말이다. 그 사소한 일에 난 감동했다. 감동에 눈물을 흘리지 않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아들. 너도 할 수 있는 아이였어!


저번 주는 날마다 전화를 해서 군대에 온 느낌이 안 든다며 며칠 쉬었다가 전화를 한다고 했다. 그러자고 말했다. 아들은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다. 그곳의 공기가 나의 공기와 다르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공기를 잘 호흡하고 있는 거 같아 다행이다. 내가 속옷을 정리해줬다 해서 아들이 어린애였던 게 아니었는데, 난 그런 아들을 어린애로만 봤다. 


군대에 간 아들을 보며 알았다. 아들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라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엄마와 하는 대화와 아빠와의 대화가 달라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알았다. 


아들은 지금 번데기처럼 똘똘 말려 성숙한 사회인으로 비상할 준비를 하고 있다. 갇힌 생활이 답답하고 힘들겠지만, 그 시간을 잘 견뎌낸 아들은 힘차게 오를 것이다. 난 그 믿음으로 자유의 공기를 조금씩 흡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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