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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Mar 11. 2023

가스라이팅이라고? 아니. 그건 사랑이었어

가스라이팅이라고?

"엄마, 정말 그 말을 믿었어? 그렇다면 엄만 재원이한테 가스라이팅 당한 거야."

"무슨 소리야. 재원이가 얼마나 착한 얜데. 너 자꾸 재원이 모함할래? 그리고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인데, 내 아들은 세상 누구보다 진실된 아이야. 엄마를 두고 그런 빈말을 할 애가 아니란 말이지."

"와, 우리 엄마 제대로 당했네."

폰을 통해 들리는 딸의 목소리는 점점 볼륨을 높이고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나의 반응에 자꾸만 아들이 나를 속였다며 열까지 내면서 말이다.


'칫,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이래서 넌 한참을 더 커야 하는 거야. 솔직히 너도 모르진 않지. 네 동생이 이 엄마에게 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그건 가스라이팅 같은 치졸한 행위가 아니야. 그건 말이지, 아주 따스하고 정다운 말이었어. 굳이 이름을 빌어 표현하자면 사랑과 같은. 엄마를 향한 아들의 사랑. 알겠냐. 이 팩트로 똘똘 뭉쳐진 정 없는 딸아'


나에게 가스라이팅 운운하는 딸은 이성주의자가 맞다. 감성보다 이성이 앞선 이성주의자. 그래서 가끔은 냉정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딸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 이 말은 아들이 날 가스라이팅했다는 말을 인정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딸의 말속에 나를 꿰뚫는 사실이 들어있는 걸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딸에게 전화를 하면 습관처럼 묻곤 했다. 밥 잘 챙겨 먹고 있냐, 운동은 열심히 하고 있냐. 나보다 야무진 딸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마는 잔소리병이 도져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전화를 할 때마다 지껄이는 것이다. 회전목마처럼 빙빙 돌려가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묻는 말이 거슬렸는지 딸이 내 건강을 들먹였다. 엄마도 이제 건강을 챙겨야 할 나이가 되었다고. 건강을 위해 운동을 좀 하라고. 그러다 대뜸,

"엄마, 살 좀 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좀 무거워졌는데 내 목소리에 살찌는 소리가 묻었나 싶어 뜨끔했다.


"왜? 재원이는 지금 내 모습이 딱 좋다는데. 넌 아니야?"

"와~. 재원이 이 자식, 엄마를 완전 가스라이팅했어. 엄마? 엄마는 보기 딱 좋은 게 아니라 쪘.어. 그러니까 좀 빼야 해. 운동도 하고 식단 조절도 하면서. 의리 없게 혼자만 하지 말고 아빠랑 같이. 날 걱정할 때가 아니라 엄마를 걱정해야 할 때라고."

"아닌데, 내 아들은 지금이 딱 좋다고 했는데."


아들은 나를 볼 때마다 웃는다. 그리고 말한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저는 엄마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해요."

"원래 엄마들은 살이 좀 쪄야 더 포근해 보이잖아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지금이 딱 좋아요"

내가 살이 찐 거 같다고 걱정을 해도 늘 보기 좋다, 지금이 가장 좋다 걱정하지 마라 했다.


가스라이팅을 당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그 상황 속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에 그 속박이 자유롭다. 스스로 만족하라고 다독이는 내면의 손길마저 안온하다.


그건 사랑이야

괜찮았다. 아들이 보기 좋다는데. 엄마는 그래도 된다는데. 아들의 말에 나를 합리화시키고 정당화했다. 가스라이팅이 이런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단 생각도 했다. 건강검진에서도 비만도가 정상이라는데 뭘 얼마나 더 빼라고. 하지만


지금 난 운동을 하고 있다. 식단 조절도 한다. 딸의 말 때문이 아니고, 아들의 말을 믿지 못해 한 행동도 아니다. 그저 날이 좋아서다. 날이 좋아서 몸을 움직이고 싶어졌다. 


아들이 고맙다. 날씬하지 않은 엄마를 부끄럽지 않게 바라봐 줘서.

그동안 엄마를 마음 편하게 가스라이팅해줘서.

그럼에도 살은 좀 빼 볼게. 네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한다 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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