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잠을 설쳤다. 눈을 감았는데도 정신이 말똥말똥해 몸을 뒤척였다. 머릿속이 물고기가 사라진 어항처럼 맑고 투명해졌다. 투명해진 머릿속에 흰 장막이라도 두르고 싶었지만 생생하게 살아난 정신은 흐릿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뒤척임에는 원인이 있었다. 아들 때문이었다.
내가 잠자리에 누운 그 시각, 자대 배치를 받은 아들이 첫 근무를 나간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뜨시고 포근한 잠자리를 찾아 이불속으로 파고들 때 아들은 생전 처음 누군가의 밤을 지키기 위해 나간 것이다. 입춘이 지났다지만 아직은 찬 겨울이다. 한밤중의 날씨가 춥지는 않을까? 무섭지는 않을까? 바람소리마저 잠든 침묵의 시간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아들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신병교육이 끝났을 때 교육장을 찾은 나에게 아들은 말했다. 전방에서는 자신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으니 엄마는 다리 쭉 뻗고 편하게 주무시라고. 자기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잠들 수가 없었다. 다리가 뻗어지지도 않았다. 마음 같아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아들이 있는 그 침묵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제는 하필 gop에서 숨진 이병의 아버지가 뉴스에 나온 것을 봤다. 군에 간 아들이 있어서인지 군에 관련된 모든 일에는 귀가 쫑긋 선다. 온몸의 촉수가 그곳을 향하는 느낌이다. 소용돌이 속으로 물이 빠져들 듯 온 기운이 그곳으로 빠져든다. 이런 부모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군은 대한민국의 아들들을 잘 지켜내야 한다. 세상 부모들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보냈는지 알아야 한다.
남편은 군대를 쉽게 말한다. 3년 군대 생활을 한 자신에 비하면 아들의 1년 6개월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근거 없이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웃기도 한다. 하지만 21세기 군대가 아무리 20세기의 군대와 다르다 한 들 자유가 있는 이곳의 생활만 할까. 그것을 알기에 안쓰러움의 제 일번지는 결국 아들이 있는 군일 수밖에 없다.
어제는 종일 아들의 연락을 기다렸다. 첫 근무 소감을 말해준다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였다. 남편은 군기가 바짝 든 거 같다며 기다려 보라고 했다. 혹시라도 야단을 맞고 소심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걱정이 쌓인다. 해결되지 않은 걱정이 맞춰지지 않은 테트리스처럼 태산을 이룬다. 기다려야지. 아들을 위해 걱정을 거두고 기다려야지.
아들은 나의 밤을 지켜주고 있지만, 나의 밤은 아들 걱정에 잠들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