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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Apr 27. 2023

나이 드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

시작은 언제든 할 수 있다

나이 든다는 것이 두려운 때가 있었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부터였다. 그럴 때마다 나란 존재가 사라진 시간들을 상상하곤 했다. 내가 사라져도 아무 거리낌 없이 발전하고 변해갈 그런 세상을 말이다. 그렇게 나이 든다는 것은 공포스럽고 서러운 일로 나를 찾아왔었다.


그런데 막상 반백년이란 시간을 살아보니 나이 든다는 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건 책임져야 할 무게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과 같았고, 나에게 주어진 자유가 비로소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결혼 이후 지금처럼 여유로운 때가 있었던가를 생각한다. 혹자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소위 말해 신혼이라 불리던 때가 지금처럼 여유롭지 않았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다. 그때 난 낯선 곳에서 낯선 부모님들과 신혼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아이들이 태어난 후는 어땠냐고? '아이들이 태어난 후'라... 그때를 떠올리면 저절로 헛웃음이 난다. 솔직히 말해 그 시간은 내 인생에서 전혀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성격의 한 단면을 본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난 처음 알았다. 나도 누군가처럼 뾰족해질 수 있는 인간이란 걸. 내 마음 깊은 곳에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성격이 웅크리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니 그때의 시간은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미로 속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시시프스의 바위처럼 되풀이되는 일상을 표정도 없이 굴리고 또 굴리고 있었으니까.


그 시절에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 간절했다. 나만을 위해 차를 마시고, 나만을 위해 독서를 하고, 나만을 위해 텔레비전을 보는. 오죽했으면 혼자 있을 수 있는 샤워 시간이 가장 자유롭게 느껴졌을까. 그렇게 나만의 시간을 바라고 바라며, 시계추 끝을 부여잡고 돌고 또 돌다 보니 어느 순간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이 턱 하니 앞으로 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대 이제 여유로워질 시간이 되었노라며.


지금은 그토록 갈망하던 시간 속으로 들어와 내 젊은 날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열심히 살아온 시간에 대한 보상처럼. 그렇다고 이 시간을 몸서리치게 황홀해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지는 않다. 갈망으로 얻어낸 시간이라도 결국은 일상을 벗어난 삶은 아니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 다 내 안에 존재한 시간이었고, 내가 채워가야 할 하루였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시간을 채우는 일이 예전처럼 고단하지 않다는 것일 뿐이다.


삶이란 살아내는 것이고, 살아낸다는 것은 무수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통과해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게 된다는 말과 통했다. 뾰족했던 모든 성격이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 잘 다듬어지면서 말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늙어가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을 나이가 들고서야 알았다.


한때 중년 여성들은 빈둥지증후군이라는 것을 느꼈다는데, 난 이 말이 참으로 낯설다. 딸이 대학을 가면서 독립을 하고, 아들이 군대를 간 지금 남아 있는 건 허탈함이나 외로움이 아니다. 남은 건 둘에 대한 깊어진 사랑이며, 자유로움이다. 주변에는 공부하는 여자들이 많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경제활동을 하는 여자도 많다. 남편들이 퇴직을 앞두는데 여자들은 일을 찾아 나선다. 새삼 우리나라 여자들처럼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사람들이 있나 싶을 정도다.


나는 지금이 참 좋다. 온전히 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는, 새롭게 도전한 일들이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도 좋다.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걷는 걸음걸음이 활기차고 가볍다. 욕심이 흐릿해지니 마음은 투명해지고 맑아졌다. 봄날의 아지랑이 마냥 나른하고 느긋해졌다.


나이든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느낀다. 시작을 할 수 있는 때가 정해져 있지 않듯, 도전을 위한 때도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언제든 도전할 수 있고, 도전할 시기는 각자가 정할 뿐이다. 어쩌면 도전을 망설이고 있는 때가 도전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인가를 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가장 적합한 시기다. 나이가 시작을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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