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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un 23. 2023

같은 시간을 살아도 기억하는 과거는 다르다

서로 다른 과거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보면 싱아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시골에서 이사를 온 작가가 서울 아이들이 아카시아꽃을 포도송이처럼 들고 먹는 모습을 보고 따라 했다가 비릿하고 들척지근한 맛에 헛구역질을 느끼며 시골에서 먹었던 싱아를 떠올리는 장면에서다.


작가는 싱아를 시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풀로 찔레꽃이 필 무렵이면 줄기에 살이 오르고 연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싱아의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아카시아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데 제격일 거 같다고 말한다.


글을 읽다 싱아가 어떻게 생긴 풀일지 궁금했다. 시골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며 내가 한 번쯤은 봤을 만도 한데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컴퓨터를 열어 검색창에 싱아를 친 후 설명을 읽어보고, 이미지를 살폈다. 알 수가 없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을 거 같은 것이 싱아라는 풀 같았다.


그런데 며칠 전 수업을 하다 당시 내가 느꼈던 기분을 내 설명을 듣는 아이들이 느끼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아이들에게 수수를 설명할 때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내 어린 시절에는 연한 수숫대를 잘근잘근 씹어먹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수숫대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하겠다는 듯 멀뚱거렸다.


"수수를 몰라? 왜, 있잖아.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호랑이가 떨어져서 빨갛게 변했다는 그 곡식. 그림책에서 수수 그림 못 봤어? 마트에서도 수수는 파는데"

"이야기는 알겠는데 수숫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럼, 옥수수는 알아? 수숫대는 옥수숫대보다 잎과 줄기가 조금 더 날씬한 편인데."


수수의 줄기가 옥수수 줄기와 닮았다고 해도 고개를 저었다. 급기야 검색을 해서 이미지를 확인시켜 줘도 '아~'하는 반응은 없었다. 도통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옥수수니, 수수니 하는 곡식의 열매와 그 몸체와 연결 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대한 체감 온도

가끔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여긴 것들을 아이들이 알지 못했을 때 느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다. 나의 가까운 과거가 그들에겐 아득하게 먼 과거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내가 6.25 때 태어난 것이 아니냐며 수숫대 씹어먹은 경험을 몽실언니 식모살이하던 때로 여겼다. 나의 경험은 80년대의 일이고, 지금과는 거리상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인데도 말이다. 6.25가 일어났던 50년대와 비교하면 발전의 정도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는데, 아이들은 그 시기조차 머나먼 과거로 인식했다. 그들에겐 50년대나 80년대나 멀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렇듯 과거를 이야기할 때면 과거가 나를 오래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현실과 종종 마주한다. 나의 과거가 현재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동그마니 나동그라지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그래서 요즘처럼 한참 수박을 먹을 때면 떠오르는 원두막의 추억은 고이 접어 머릿속 한 귀퉁이에 넣어두곤 한다. 그것 역시 아이들에겐 교과서 속에서나 한 자리 차지할만한 옛날의 이야기일 테니.


수숫대를 먹던 그 시절, 나는 할머니와 함께 인간 cctv가 되어 원두막을 지키는 파수꾼 노릇을 한 경험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랐구나 싶어 섬뜩한 기분도 들지만, 그 당시에는 할머니만 있으면 수박이나 참외를 서리하러 오는 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 어두운 밤 플래시(flash, 랜턴) 하나에 의지해 마을과 동떨어진 논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외딴 원두막에서 겁도 없이 수박이며 참외를 지킬 생각을 했지. 아니면 이름마저 예쁜 서리를 도둑질이 아닌 손님 방문 정도로 생각했거나.


이제 수숫대를 잘근잘근 씹어댔던 일이나 어둠의 장막을 뚫고 시원하게 풍겨온 참외의 달큼함은 어쩌다 꺼내먹는 추억거리가 되고 말았다. 다른 추억거리를 골라 먹을 때는 잊고 지내기도 하면서. 하지만 과거는 언제나 아련함과 함께 미소를 데리고 온다. 점점 높게 쌓여가는 과거의 탑이 공든 탑이 되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갑자기 먼 훗날 지금의 아이들은 자신의 과거 속에서 무엇을 꺼내 먹을까가 궁금해졌다. 그들의 과거도 아련함으로 미소를 손잡고 올까? 바라건대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현실이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면 그런 과거에 의지해 한 번씩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꺼내 먹을거리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비록 자신의 다음 세대가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것이냐고 비웃어도 그 과거로, 그 추억거리로 그렇게 웃는 날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것이 풍요롭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내가 지금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니까.


박완서 작가의 싱아가 나의 수숫대로 이어지듯 아이들의 그 무엇인가로 이어지길 바란다. 그것이 너무 빠른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아이들에게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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