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과외를 받는 중입니다.
글을 지웠다가 썼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오늘은 재영 형님께 철학 수업을 받은 날이다. 오늘 형님의 표정, 말의 고저 등이 자꾸 떠올라 글을 남기고 싶었다. 그럴듯하게 적고 싶어서 고민을 했다. '에잇.. 그냥 하루를 나열하듯 쓰자.' 가치 있는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행복하고 소중한 날이니 그냥 쓰기로 한다. 사람들의 눈에 그려지는 글이라면 나쁘지 않은 글이려니.
오늘은 망원동 엔트러사이트에서 만났다. 오전의 엔트러사이트는 조용하고 한적하다. 오늘 시킨 커피는 [공기의 꿈]. 산미가 있는 원두들을 블렌딩 한 조합이다. 이제는 커피 컵노트를 보고 고를 때 재영 형님이 보여주셨던 커피 향 노트(?)가 생각난다. 원래도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그날 이후 더 열심히 산미를 좇는다. 그렇게 오늘도 [공기의 꿈]으로 시작한 하루다.
조금 일찍 도착해 형님이 추천해 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잠깐 읽었다. 어제까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벼락치기를 했더니 여간 피로한 게 아니라서 한숨 돌리고 싶었다. 초반부부터 주옥같은 구절이 있어서 표시를 해두며 읽다가 멀리 형님이 보인다. 여주에 가시고 얼굴이 오히려 더 편해지고 좋아지신 듯하다. 일은 바쁘시다고 말하지만 맑은 분위기가 풍긴다. 하긴 함께 수요일마다 만날 때에도 순수함은 형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자리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 괴테 이야기 등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함께 했다. 이원론과 일위론, 현존재의 시간성과 역사성, 괴테가 적어놓은 스피노자 이야기 등 아직 어렵지만 내 의견, 질문도 남기며 시간을 보냈다. 개별적인 이야기, 철학 역사의 흐름도 기억에 남지만 오늘 나에게 가장 와닿았던 것은 철학이 삶을 향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생동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관계를 그 속에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다른 것들과 결합해서 우리에게 주는 인상이 오직 완전무결한 존재에서 유래할 때 우리는 그 인상을 진실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존재가 부분적으로 쉽게 파악할 될 수 있는 방식으로 한정되어 있고 또 우리가 그 존재를 파악하고 싶을 정도로 우리의 본성과 관계하고 있는 경우 우리는 그 대상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 괴테 [자연과학론] 중 -
이 부분을 읽어주시며 말씀하시는 허무하지 않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괴테가 적어놓은 부분을 토대로 말이다. 세계의 부분인 우리는 세계의 다른 구성요소들과 관계한다. 관계를 넘어 사실 다 '나'다. 내가 하는 행동들이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 '나'를 향한 것이라고 느낄 때, 그리고 그것이 세계 전체를 향한 것이라고 느낄 때 아름답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보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제안해 주셨다. 이 말을 통해 내가 지나치게 기준을 필요로 하고, 틀에 집착하지 않았나라는 반성을 했다. '형님처럼 철학하고 싶다!'라는 생각도 강하게 들었다. 철학 공부를 삶에 이어나가는 방향으로 철학을 대하는 형님의 자세를 따라가 보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더 진하게 남아 있는 것은 이 말을 할 때의 형님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였다. 순수했고 강했다. 그래서 아름다워 보였다. 적어도 나에겐.
엔트러사이트에서의 시간이 끝나고 밥을 먹고 시장을 보며 이야기는 계속 오갔다. 못 본 기간 동안의 소식, 앞으로 어떤 책을 읽어나가면 좋을지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장을 다 보고 차 앞에서 시장에서 산 바나나 두 개를 주는 형님. 함께 읽은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60 꼬뻬이까가 생각난다. 현실을 종종 겁내고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에게 건네는 바나나 2개는 형님이 표현하는 실천적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형님과 함께한 금요일이 마무리되었다. 3주 뒤 금요일이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