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살 '경단녀'입니다.
<출산 후 두려운 삶에 대하여> 나도 작가다 2차 공모전
저의 사회적 신분은 ‘경단녀’입니다. 하지만 지인들은 ‘열정녀’라 칭합니다. 마흔을 앞둔 82년생이지만 아이와 제주도 한달 살기를 세번이나 다녀올 만큼 열정 넘치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남편과의 로맨스를 꿈꾸며 자상하고 친절한 엄마이고 싶고, 바가지 안 긁는 아내이고 싶고, 커리어 여성이고 싶은 꿈 많은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늘어나는 잔소리로 남편과의 관계는 멀어졌고, 아이에게는 짜증과 화를 내는 엄마이자 경제적 자립을 하고싶은 가정주부입니다. 개인마다 만족하는 바와 목표하는 것이 다르기에 저에게는 둘째, 셋째를 잘 낳아 키우고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감옥과도 같았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아름답게 꾸리는 것도 좋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에 목표를 두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아이를 돌보며 건강한 음식을 만드는데 행복을 느끼는 엄마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마저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현재에 만족하지도 현재를 즐기지도 못하는 제 삶이 두렵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정 있고 꿈 많던 제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처음부터 아이에게 화내는 엄마는 아니었다. 결혼 5년만에 시험관 시술로 어렵게 딸을 가졌다. 태교도 히프노버딩, 남다른 평화로운 자연출산을 준비했다. 하지만 엄마의 바램과 다르게 딸은 2570g의 몸무게로 응급수술로 태어났다. 단 70g의 차이로 인큐베이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식단조절 한답시고 설쳤던 엄마의 욕심이 미안했다. 그래서 밤중 1시간마다 깨서 모유수유를 감당했고, 입술이 불어터져도 유축기로 젖을 짰다. 편하게 간호사에게 맞기도 자도 분유를 먹여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조리원 퇴원 후 시댁에서 편하고 건강하게 몸 조리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러나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6살 외손녀를 돌보는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갓난 친 손녀와 출산한 며느리까지 챙기는 부담감이 컸음이라. 결국 누구에게도 득이 될 수 없었던 한 달 간의 시댁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복귀했다. 여든을 앞둔 연로하신 친정 엄마, 시누이 애를 돌보느라 여념 없는 시어머니를 둔 나는 양가부모님 어느 쪽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딸 아이와의 육아생활을 시작했다. 출산 전 청소년상담사와 진로강사 프리랜서로 일을 하던 나로서는 한창 제2의 직업으로 실현시켰던 상담사 일을 그만 둬야만 했다. 그렇다고 아이를 낳은 것을 후회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홀로 육아는 너무나 힘들었지만 딸의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새벽 동이 틀 무렵 딸에게 젖을 물리며 소파에 앉아 수유하는 그 시간이 참 평화롭고 행복했다.
그렇게 5~6개월이 흘렀을 무렵 다시 일이 하고 싶어 졌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했다. 돌 전 아기를 중국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을 뿐더러, 남편도 반대했다. 직장을 다니는 남편은 단 일주일 출산휴가를 얻었을 뿐, 한달에 반은 해외출장으로 집을 비웠다. 남편은 ‘갓 태어난 아이의 가장’으로 사회적 신분이 바뀌어 있었고, 회사는 업무를 더 시켰다. 딸과 아내를 위해서 그 일을 마다 하지 않고 해야 했다. 여자들이 육아로 사투를 벌이는 동시에 남자들도 가장이라는 책임감과 부담감을 앉고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경단녀’가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잘 나가는 회사를 다니는 남편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자아실현을 위해 일을 한다 치더라도, 번 돈을 몽땅 도우미 아줌마에게 투자해야 했다. 그래서 내 꿈은 ‘육아휴직’이라는 명분아래 포기해야만 했고, ‘잠시’라는 시간은 4년이란 ‘공백’이 되어 ‘경력단절여성’이라는 이력으로 한 줄 채워졌다. 이 모든 상황에도 큰 불평불만없이 육아에 전념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아이에게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늘 존경하던 남편에게도 무서운 아내로 돌변했다. 아이에 관한 대화 말고는 이어갈 얘기거리도 없어졌다. 내가 속한 삶의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게 변해 있었다. 가끔은 시누이가 부러웠다. 엄마가 집 청소부터 아이 등/하원 픽업까지 모두 해주는 ‘육아그랜마’가 있다는 사실이 날 미치도록 샘나게 했다. 아이가 심하게 칭얼댈 때는 이대로 어딘가로 떠나 딱 한 달만 혼자 있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혹여 신이 나를 불쌍히 여겨 선물을 주신다면 ‘1년만 자유롭게 해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 순간 느꼈다. 나에게 한계가 온 것을, 휴식이 필요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를 돌보는 것이 아닌 육아로부터 휴직하는 ‘육아-휴식’이 필요했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 앞에서 오늘도 난 어린 딸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또 감정조절에 실패했다. 하루에도 몇 십 번씩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채울 수 없는 욕구불만은 언제든 찾아와 나를 뒤흔들었다. 내가 미쳐가는 것은 아닌지 혹여 아이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윗집 엄마도, 아랫집 언니도, 조리원 동기들도 나와 같은 ‘출산 후 육아 스트레스 장애(Parenting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고 있었다. 언젠가 고충을 털어놓은 나에게 상담사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넌 충분히 좋은 엄마야. 아이에게 포옹을 못했다고 마음 쓰는 네가 어떻게 나쁜 엄마일수 있겠냐?” 처음 보았지만 용기를 주는 그의 말에 울컥했다. 그랬다. 짜증 한번 안 내고 키우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삶에 지쳐 고단한 현실육아에 모두가 그렇게 화를 내고 살고 있었다. 기억 저편에 있던 젊은 시절 내 엄마의 욱하는 모습도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엄마가 좋았다. 25년 전 운동회날 일하느라 못 오는 엄마를 기다리며 김밥을 삼키던 어린 날의 내 감정은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엄마가 된 지금 딸에게 물었다. “엄마가 화내도 엄마랑 있는 게 좋아?” 주저없이 대답했다. “응!” 엄마라는 존재, 아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엄마임을 그 순간 깨달았다. 엄마가 되고도 4년이 지난 지금 에서야 말이다.
매슬로우 5단계 욕구이론이 있다. 생리적, 안전, 소속, 존중 그리고 자아실현 어느 것 하나도 충족시킬 수 없는 현실육아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난 딸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는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의 남편, 시댁, 친정, 직장 모두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심리학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위해서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엄마인 나의 안정감은 어디서 찾는 단 말인가? 뽀로로, 어린이집, 놀이터 몇 안되는 범주 안에서의 대화로 이제 더 이상 잘 나갔던 강사로서의 어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들었다. 머리는 점점 굳어가고 체력은 바닥이 났다.
워킹맘으로 다시 도전을 하고 싶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혹자는 말했다. 도전이나 해봤냐고. 그렇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18개월 딸이 어린이 집 첫 등원하던 날 난 학교상담사 복직신청을 했다. 출산 후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 시간이었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면 안될 것 같았다. 새롭게 자리잡은 ‘작가’라는 꿈을 이루고자 TBS 우리동네 라디오 시민활동가에 도전했다. 오랜만에 주어진 ‘일거리’에 기뻤고, 점차 미디어 영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성취감도 느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아이와 종일 씨름한 후 밤12시, 졸리는 눈꺼풀을 뒤집어가며 방송대본 작업을 해야 했고 주말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대학원 준비에도 매진했다. 결과는 대 참사, 나는 목디스크 남편은 대상포진에 걸리고 말았다. 열정 하나로 미래에 투자할 만큼 이제는 현실도, 체력도, 나이도 도와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백수가 되었다.
출산 후 달라진 삶, 그렇게 4년이란 직업공백은 ‘경력단절여성’이라는 범주 안에 날 가두고 말았다. 부모로서 양육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여전히 자유롭고 싶었다. 행복감과 우울증이 찾아오는 아이러니 속에서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아침 9시면 아이 등원을 시키고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 4시면 아이를 픽업하러 갈 것이다. 여전히 꿈이 그립고도 두렵다. 어쩌면 내가 두려운 것은 ‘화내는 엄마’란 사실 보다도, ‘꿈을 포기한 삶과 불안한 미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