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아주는 밤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을 보다가 깊게 와 닿았던 장면이 있다. 바로 유미가 자신의 프라임 세포인 사랑세포를 위로해주는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나를 위로해주는 건 결국 나. 염세적 표현으로 나를 안아주는 건 나밖에 없다가 아니라 가장 나를 편안하게 안아줄 수 있는 건 내가 아닐까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루리 작가의 [긴긴밤]의 책장을 덮으며 다시금 떠올랐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어려서부터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 노든. 그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코끼리들이었다. 언제나 코끼리들과 지내다보니 노든은 스스로를 코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코는 자라지 않았고 오직 뿔만 자라났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노든에게 주변의 코끼리들은 '우리 옆에 있으면 돼'라고 말해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코뿔소의 겉모습을 가진 코끼리라고 자신을 여기며 자라난 노든은 어른이 되었고 자신의 선택으로 코끼리 고아원을 나와 세상으로 향한다. 그런 노든을 향해 코끼리들은 '우리를 잊지 마'라고 말해준다.
세상 밖으로 나온 노든은 아내를 맞이하고 예쁜 딸도 얻는다. 그의 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코뿔소의 코를 원하는 사냥꾼 무리에 의해 노든은 아내와 딸을 잃고 자신의 목숨도 곧 꺼질 위기에 닥친다. 이때 사람들이 노든을 발견하고 그를 급히 옮겨 치료한다. 그리고 노든은 '파라다이스 동물원'에 들어가게 된다.
기분 좋은 얘기를 하다가 잠들면, 무서운 꿈을 꾸지 않아. 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시험 삼아 오늘 나한테 바깥세상 얘기나 들려줘 봐. 이봐, 나는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가 본 적이 없어. 같은 코뿔소끼리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얘기 좀 들려줘.
파라다이스 동물원에 갇히 노든은 그곳에서 앙가부라는 또다른 코뿔소를 만난다. 동물원 밖으로 나가 본 적 없는 앙가부는 노든에게 바깥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른다. 하는 수 없이 앙가부에게 아내와 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 노든은 그날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렇게 노든은 힘겨운 밤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게 된다. 노든과 앙가부는 함께 동물원 밖으로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지만 이 계획은 허무하게 실패로 끝나고만다. 대신 인간들의 전쟁이 시작되고 그덕에 울타리가 무너져 노든은 동물원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앙가부는 이미 죽은 뒤였기에 노든은 혼자였는데 그의 옆으로 양동이를 입에 물고 뒤뚱뒤뚱 따라오는 펭귄 치쿠와 만나게 된다.
그 애를 바다에 데려다준다고도 약속해.
동물원을 나온 노든은 바다를 향하는 치쿠와 함께하게 된다. 하지만 그 길은 무척이나 험했고 길었으며 긴긴밤들의 연속이었다. 어느날 치쿠는 노든에게 양동이 속 알을 돌봐달라는 부탁과 함께 알에서 깨어날 새끼 펭귄을 바다에 데려다 달라는 약속을 해달라고 한다. 노든은 마지못해 치쿠와 약속한다. 그리고 치쿠는 약속 덕분인지 힘들었던 삶을 내려놓는다. 다시 혼자가 된 노든은 최대한 알을 따뜻하게 해주기위해 노력했고 그 정성 덕분인지 알에서 펭귄 하나가 태어난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이리 와. 안아 줄게. 오늘 밤은 길거든.
새끼 펭귄과 함께 바다를 향하던 노든은 바다에 도착하기 전, 지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쓰러진다. 곧이어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새끼 펭귄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노든을 실은 트럭에 몰래 숨어들어 그와 함께한다. 사람들은 기력이 쇠한 노든을 극진하게 돌본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그를 응원한다. 새끼 펭귄은 낮에는 그런 노든과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밤이 되면 노든에게 다가가 그와 함께한다. 그러다 이제 자신의 바다를 향해 떠나야함을 받아들인 새끼 펭귄은 노든과 긴긴밤을 보낸 후, 자신만의 바다를 향한다.
긴긴밤을 함께 보낸 누군가와 '우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우리'와 이별하기도 하며 그렇게 밤은 더욱 길어진다. 그럼에도 오늘을 살아가고 밤에 잠들 수 있는 건 긴긴밤을 견뎌내게 해 줄 기억이 있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모두 '나'. 그런 밤들을 견디다 보면 어른이 되기도 한다.
[긴긴밤]은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그렇다고해서 어린이들만을 위한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밤이 길었던 누군가에게 깊게 와 닿는 작품이다. 다만 조금 아쉬운 건, 내가 어린시절에 이런 작품을 읽었다면 더 좋았을 걸 이라는 것 뿐. 그만큼 좋은 작품이다.